신문 제목 다시 보기 
말의 뿌리를 찾아서 
이런 일을 했어요 
문화 들여다보기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우리말 다듬기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일터에서 말하다 
교실 풍경 
국어 관련 소식 
우리말 실력 알아보기 
처음으로 | 국립국어원 | 구독신청 | 수신거부 | 다른 호 보기

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걸이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젓꼭지는 더 깜안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빩안 언제나 힌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 곬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뫃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개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노름 말 타고 장가가는 노름을 하고 이렇개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웋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 하고 제비손이 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 번이나 독구고 홍게닭이 멫 번이나 울어서 조름이 오면 아릇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끄리는 맛 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 곬 族’, 1935. 11. 「朝光」, 『사슴』,鮮光印刷株式會社, 1936.)
※ 단락 번호는 글 쓰는 이가 매김

  백석(白石, 1912~1963)의 시 ‘여우난 곬 族’은 제목부터 낯설다. ‘여우가 나는 골짜기’, 즉 ‘여우가 사는 골짜기’의 족(족속)이라는 제목은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의 ‘늑대와 춤을’, ‘주먹 쥐고 일어나’ 같이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시 접근도 무척 껄끄럽다. 어디서 띄어 읽어야 하는지 당황스럽고 쉽게 뜻을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한 가지 더 불평을 말한다면 제6연의 ‘이 그득히들’에 ‘이’가 대명사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런 시 읽기나 시 엿보기의 껄끄러움, 그리고 읽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먼저 각 연별로 평북 방언의 뜻풀이를 붙여 시의 이해를 돕겠다.

1연 - 진할머니: 친할머니, 진할아버지: 친할아버지
3연 - 매감탕: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5연 - 반디: 밴댕이의 평북 방언
6연 - 안간: 안방, 송구떡: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떡
7연 - 저녁술: 저녁밥을 먹는 숟가락, 섶: 옆의 방언, 밭마당: 바깥마당, 쥐잡이: 쥐잡기의 북한어, 숨굴막질: 숨박꼭질
8연 - 아릇간: 아랫방 조아질: 공기놀이. 쌈방이: 주사위, 바리깨돌림: 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유희, 화디: 등잔을 얹어놓는 기구, 사기방등: 흙으로 빚어서 구운 등, 홍게닭: 새벽닭 텅납새: 처마의 안 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욱적하니: 한 곳에 모여 조금 수선스럽게 들끓는 모양, 무이징게국: 징거미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명절날, 말하는 이인 ‘어린 나’를 비롯해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줄줄이 큰 집을 찾아가는 정경이 다음 구절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제1연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를 읽으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린 내가 부모에 소속되어 그 뒤를 따라가듯이 우리 집 개는 내 소속이라서 당연히 나를 따라온다는 주인 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부모를 따라가는 어린애가 아니라 개를 인솔하고 가는 주체성 있는 사람이란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중요한 인물(?)인 나와 나의 부모는 이 시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아버지를 비롯한 나의 가족은 이 시의 1연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립적인 첫 단락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 2연~5연이 두 번째 단락이고, 6~7연이 세 번째, 8~9연은 네 번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어리지만 주체성이 확고한 나의 눈으로 본 삼촌, 고모, 사촌, 외사촌의 성격을 보면, 말하는 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 분 누님(신리 고모/ 토산 고모/ 큰골 고모)을 낳은 뒤 낳은 첫아들이시고 그의 첫아들이자 장손인 나는 가족 간에 특별한 존재이다. 아버지 밑으로 남동생(나의 삼촌)을 한 명 더 낳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3녀 2남의 자손이 있으시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2명 혹은 3명씩의 자손을 낳아서 모두 10여 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이 이 시에서 할아버지 댁에 명절날 모였다. 이런 모임을 일컬어 ‘여우난 골족’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 시의 문장 성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단락: ‘-가면’ 조건절
2단락: 고모와 삼촌네 가족들, 주절
3단락: ‘-이’(주격 조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안간에들 모여서 명절 음식을 먹는다. 서술절
4단락: 아이들은 바깥 마당에서 놀다가 웃방에 가서 새벽까지 놀다가 잠이 든다. 서술절

  이와같이 1연이자 1단락은 ‘-가면’의 조건절로 끝나고, 2~5연을 이루는 2단락은 명사이자 주절로 끝나고 6~7연인 3단락과 8~9연인 4단락은 서술절로 끝난다. 그래서 시 전체는 한 문장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보면 “조건절(부모와 내가 가면)─주절(고모, 삼촌, 사촌들)─서술절(‘이’ 모여 명절 음식을 먹는다)─서술절(놀다가 잔다)

  이렇게 시 전체가 단일 문장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시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명절날 고모네, 삼촌네가 할아버지 댁에 모여 같이 음식을 먹고 놀고 하면서 한 족속임을 확인하는 모습과 한 덩어리의 문장 구조로 이루어진 시 전체 구조가 병행한다는 사실이다. 그 연결 고리의 핵심에는 3단락 6연의 “‘이’ 그득히들 할머니……”의 문장이 놓여 있다. ‘-이’라는 한 단어가 대명사가 아니라 앞의 6단락 전체를 아우르는 주격 조사가 되는 연결 고리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치는 고모네 가족 명칭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외사촌이 되는 고모의 딸들은 모두 ‘-女’자가 붙고, 아들은 ‘-동이’자가 붙는다. 큰고모인 신리 고모는 얼굴은 좀 못생겨도 하루에 베 한 필을 짤 정도로 일 솜씨가 뛰어나고, 토산 고모는 늙은이에게 시집가서 그런지 성깔이 있고 얼굴색도 검다. 셋째인 큰골 고모는 과부가 되어서 그런지 눈물을 잘 흘린다. 아버지의 동생인 나의 삼촌은 일도 잘 하지만 술 마시면 주사도 심하다는 등의 흥미로운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어느 집이나 다 즐겁고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이 ‘여우난골족’은 부모와 형제, 사촌, 외사촌, 시누이, 동서 들이 이런 사연을 가지고 명절날 모여 즐겁게 지낸다.
  이 시와 2006년 현대의 오늘을 비교해 보면 이런 많은 형제들이 있는 대가족 사회가 우리나라였구나하고 새삼 생각되고 민족지처럼 유물이 된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족’속이라고까지 감히 부를 수 있는 대가족의 즐거움이나 명절의 흥청거림이 사라진 요즘, 민족지적인 이런 시들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국어문화유산 목록에 넣어야 할 시대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