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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 설래

신경구(전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영어 공부 한 달 만에 끝내자”라거나 “영어 4주 완성” 등의 제목을 단 영어 관련 책이 잘 팔린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영어 능력이 개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는 각계 각층의 독자층에게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제목이다. 적어도 영어에 관한 한, 공교육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영어 관련 거짓 광고가 잘 먹혀 들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영어 관련 상품이 잘 팔리는데도 실제로 학생들의 영어 능력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히트 상품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1997년부터는 정치권도 히트 상품 경쟁에 뛰어들어 왔다. 이때 내놓은 상품은 당시의 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초등 영어 교육이다. 양식 있는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실현되었고 2001년 연구에 따르면 초등 영어 교육 관련한 예산이 어림잡아 4조 원에 이른다. 영어 바람이 강풍이 되어 해외로 나가는 초중고 학생들의 수효가 1999년에는 1998년의 열 배에 이르고 현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방과 후 영어 교육 등 크고 작은 상품이 많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두 번째 히트 상품으로는 영어 마을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상품의 특징은 교육 관련 기관이 추진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정치적으로 매우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에 있다. 경기도 지사가 선거 공약으로 영어 마을을 추진해서 정치적인 바람잡이에 성공하였고, 다른 지자체의 장들과 교육청은 물론 교육인적자원부도 이 바람잡이 경쟁에 뛰어 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왜곡하는 영어 마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영어 마을의 핵심적인 문제는 그 운영의 주체가 교육 전담 부서가 아닌 정치적인 바람잡이들에 의해 행정부서가 주도하는 데에 있다. 국방부가 잘못한다고 지방정부마다 선거공약 하나로 군대를 만들고 사관학교를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의 논리를 확대한다면, 수학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수학 마을을 만들어야 하고, 법원의 판결이 불만스러우면 지방정부에 재판 마을을 세워야 할 판이다. 영어 교육이 잘못된 데에는 물론 영어 과목을 맡은 영어 교사의 책임이 일차적이기는 하지만, 영어의 문제는 전반적인 우리 교육의 난맥상이 세계화의 추세 때문에 영어라는 분야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영어 마을이 영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듯이, 지자체가 초·중등 마을과 대학 마을을 세운다고 해도 우리 교육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  영어 마을은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투자를 강요한다. 경기도에서 파주 등 세 군데 영어 마을을 만드는 데에 1,709억 원을 썼으며, 운영비도 매년 273억 원이 든다. 세 영어 마을 모두에 최대로 1,300명을 수용하여 1년 동안 교육한다고 할 때 여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270억이고, 전국의 한 학년 학생 즉 대략 100만 명에게 같은 수준의 교육을 한다고 할 때 드는 비용은 18조 원이고, 이만한 규모의 영어 마을을 짓는 데에 드는 돈은 131조로 우리나라 교육재정의 4배에 이른다(아래 표 참조). 두 학년 학생을 수용하려면 연 26조가 들고, 시설을 투자하는 데에는 262조에 이를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한두 해 교육한다고 해서 영어 능력이 기대한 만큼 신장되는 것도 아니다.
구분 소요 비용(원)
1인 1주일 1인 50주일 1,500명 1년 1백만 명 1년
유지비 360,000 18,000,000 27,000,000,000 18,000,000,000,000
건축비 131,461,538 - 170,900,000,000 131,461,538,461,538
 셋째,  영어 마을을 지자체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길을 닦고 공장을 짓는 사업과는 달리 교육은 사람을 다루는 사업으로 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긍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대학교수 출신 지방자치단체장이 영어 마을에 5일 동안 학생들을 수용해서 영어 교육의 문제를 풀겠다는 공약을 한 것은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현재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한 사람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의 언론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10% 이상이 영어를 읽을 수 없다고 개탄한다. 이렇게 영어를 모국어로 6년을 공부해도 만족한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영어 교육이다. 닷새 동안 체험하고 나오면 영어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영어 마을은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영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 문민정부만큼이나 어리석은 발상이다.
 넷째,  영어 마을은 영어 능력 향상을 보장할 수 없다. 원어민 교사 25명을 포함해 39명의 교사가 500명을 상대로 하는 파주의 경우, 교사 대 학생의 비율은 1 대 12로 교사가 하루 여덟 시간 내내 학생을 상대해 준다고 해도 학생 1인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은 36분이며, 쉬는 시간 이런저런 일로 흩어지는 시간을 고려하면 1인당 참여시간은 18분 이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영어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란 영어 마을 체험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고, 학생들의 불만만 키울 것이다.
 다섯째,  따라서 영어 마을은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게 해외 연수생의 수효를 급격히 늘리게 될 것이다. 초등 영어가 조기 해외유학 바람을 일으켰듯이, 영어 마을은 역시 조기 해외유학 바람에 더욱 부채질을 할 것이다. 영어 마을은 무책임하게 학교에서 집에서 일상화할 수 없는 현장 체험을 시켜 놓고 영어 능력은 충분히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학생들이 해외연수를 원하게 될 것이다. 현재 영어 학습 관련 비용에서 해외 어학연수에 쓰이는 돈을 합하면 그 총액은 4.5조 원으로 짐작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엄청난 사교육비의 부담과 영어 습득을 향한 욕심으로 외국으로 이민 가는 고급 인력이 많다는 점이다. 2000년에는 15,000명 정도가 이민을 갔고, 2001년에는 20,000명이 이민을 갈 것으로 추산하고, 그중 30% 정도가 정보기술(IT)업계에 종사하는 고급인력들로 준비 없는 영어 교육 바람은 현금과 두뇌 유출이라는 두 가지 통로로 국부 유출의 원인이 되고 있다(조선, 2000.12.6). 원어민 강사에 대한 수요는 국내의 일자리를 외국인에게 내주어 고용의 기회가 줄어드는 문제를 일으킨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해외 연수로 이렇게 유출된 외화는 국내에서 재화의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돈이라는 점이다. 해외 유학 바람은 머잖아 강풍으로 발전할 것이며, 우리나라 영어 마을의 가장 큰 수혜자는 학생들이 아니고 영어권 교육 기관이 될 것이다.
 여섯째,  영어 마을은 학교 교육을 왜곡한다. 학생들은 탈현실적인 닷새 동안의 영어 마을 체험을 통해서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커질 것이다. 영어 마을은 시설비를 빼고도 1인당 1천8백만 원이 있어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학교는 시간마다 다른 교과운영을 해야 하지만, 영어 마을에서는 똑같은 프로그램을 한 주일씩 돌리기 때문에 학생들을 손쉽게 만족시킬 수 있다. 비현실적인 영어 마을에 현혹된 학생들은 학교 현장의 한계에 대해 불신하게 되고, 결국은 영어 교육에서 다른 교과목에 대한 불신을 크게 가지게 될 것이다.
 일곱째,  영어 사대주의가 강화될 것이다. 영어 마을은 교육 전담 부서를 제쳐 두고 지자체가 나서서 영어 마을을 지어야 할 정도로 영어가 중요하다는 분위기는 드높였다. 영어 마을에 다녀온 학생들은 영어 마을을 통해 서양 문화를 동경하고,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면서 영어를 동경한다. 어느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너무 힘들다. 차라리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이라도 가면 좋겠다”라고 푸념을 한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 나이가 들면서 심각해지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외국인을 동경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인사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은 교육의 문제일 뿐 아니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 깊이 쌓여 있어서, 이미 기가 죽어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영어를 동경하도록 길들여진 국민은 정신적으로 더욱 손쉽게 미국의 패권에 굴종하게 된다. 초등 영어와 함께 영어 마을은 우리 국민의 사대주의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여덟째,  영어 마을은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동경심을 북돋우면서 거꾸로 영어를 못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상실하게 할 것이다. 학생에 따라서 타고난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지자체까지 나서서 추진하는 영어 마을은 이미 과도해진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과하게 만들어, 영어를 못하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을 잃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의 자신감 상실은 이들의 모든 학업 성취도에 영향을 줄 것이고, 이는 우리 국가의 장래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아홉째,  우리말 경시 풍조가 강화될 것이다. 어느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우리가 미국에 살지 않으면서 왜 한국 사람이 영어를 그렇게 잘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가 영어를 우리나라 말인 한국어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 국적은 바꿔도 우리의 본래 모습은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외국어인 영어보다는 한국어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한겨레, 2001.4.14).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학생은 소수이고, 다수는 영어 바람에 편승하여 영어를 동경하고 우리말을 소홀하게 생각하게 된다. 영어를 아예 잘한다면 영어를 동경할 것도 없다. 부모와 학교와 사회에서 영어 잘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영어를 동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잘하는 것이 큰 벼슬을 한 것 같은 대접을 받으니, 못하는 영어에 대한 동경은 커 가게 된다. 반면 우리말을 잘하는 것이 강조되지 않으니, 우리말을 소홀하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말을 소홀하게 보는 경향은 우리말 쓰기와 말하기 능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현재도 대학생들은 물론 석사와 박사 학위 논문도 논리가 정연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현재 초등 영어 세대가 어른이 되면, 더욱 논리가 부족한 논문을 쓸 소지가 크다.
 열째,  영어 능력 격차가 심화될 것이다. 영어 마을에 일부 가난한 집안의 자녀를 수용한다고 하나, 1주에 지나지 않는다. 현장 체험이 중요하다고 느낀 자녀들의 요구가 강화될 때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집과 수용할 수 없는 집 자녀 간 영어 능력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곧 영어 격차(English divide)가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이다. 영어가 취업 등 사회 진출에서 절대적인 조건으로 중요성이 커지는데 공교육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만이 개인지도, 해외연수 등을 통해서 영어라는 사회 진출 수단을 구입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소득 격차가 영어 격차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지역과 소득으로 국민이 갈라져 있지만, 머지않아 영어 격차가 우리 국민을 계층화할 날이 올 것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제안된 영어 마을은 순풍을 타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으며, 영어 바람을 광풍으로 몰아가고 있다. 교육적인 효용에 대한 엄격한 검증도 없이 시작된 영어 마을은 정치가들의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어 매력은 크나, 다른 편으로는 매우 비교육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민족적인 발상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학교 영어 교육의 정상화에 있고, 학교 영어 교육의 정상화는 능력 있는 영어 교사의 양성과 엄격한 선발 과정 및 충실한 교과과정의 운영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