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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국립국어원 국어생활부장)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이후 한번도 개정되지 않다가 2005년 12월 29일 처음 개정되었다. 제정 당시 국경일을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로 정했는데 이번에 개정되면서 한글날이 추가되었다.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기까지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비롯하여 국어학자, 국어운동가 등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다. 그분들의 꾸준한 활동이 없었다면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의를 표하며 감사한다. 또 이들의 간절한 소망과 요구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법 개정에 나선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 드디어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었다. 한글날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한글날은 왜 국경일이 될 만한가. 이런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글이 없었던 15세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을 적을 방법이 없어서 한자를 이용해서 글을 썼다. 당연히 자유롭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기 어려웠다. 물론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글이 널리 전면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서당에서는 한문을 가르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대중 매체에서부터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을 비롯한 신문이 그러하고 잡지가 그러했다. 또한 문학작품이 한글로 쓰였으며, 교과서가 한글로 쓰였다. 바야흐로 문맹 퇴치 운동이 펼쳐졌는데 그것은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문자 생활은 어떨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자나 로마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한자를 썼다면 우리말을 잘 적을 수 있었을까. 한자어가 아닌 말은 한자를 가지고 과연 어떻게 적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만일 로마자를 썼다면 우리말을 잘 적었을까. 지금 베트남어, 필리핀어, 터키어가 로마자를 가져다가 문자로 쓰고 있으니 한국어도 그러지 못하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가 한국어를 적기에 성에 찼을까. 부족함이 없었을까. 무엇보다 문화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한글이 소리글자 중에서도 가장 진화된 단계인 자질문자라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한글에 대해 한없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한글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글을 이 세상의 모든 언어의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글이 우수하다 함은 우리말의 음운체계를 잘 분석하여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든 과학성, 독창성 때문이지 아무 소리나 다 적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한글은 한국어의 소리를 적는 글자이다. 이를테면 영어의 f, v 같은 소리는 적을 수 없다. 한국어에는 없는 모음 [ə]를 어떻게 적겠는가. 그런 소리를 다 적으려면 현재의 40글자 말고 수많은 글자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수없이 새 글자를 만든다면 그것은 한글이라 하기 어렵다. 요컨대 한글은 한국어의 음운체계를 반영한 문자이지 한국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한글이 무슨 소리든지 다 적을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문자 없는 언어를 위해 한글을 보급하자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섣부른 욕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욕심을 부리기에 앞서 당장 우리말부터 제대로 적는 데에 불편함이 없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일테면 ‘사귀어’, ‘쉬어’, ‘할퀴어’ 같은 말을 줄여서 말할 때 ‘ㅟ’와 ‘ㅓ’를 합쳐서 한 음절로 적을 수 있도록 한글을 확장할 필요는 없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글과 국어에 대한 구별 부족도 바로잡아야 한다. 한글이 곧 한국어고, 한국어가 곧 한글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지식인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글은 글자를 가리킬 뿐이다. 언어는 문자 이전에 소리가 기본이다. 외국어가 범람하여 우리말을 어지럽히고 있다면 한글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오염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글날 무렵에만 반짝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가장 나쁜 습관이 아닌가 한다. 한글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한글을 인류의 위대한 지적 창작물로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만 한글의 모태가 되는 우리말 자체를 경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글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들 영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우리말이 위태로워진다면 그 한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으로 정보기술 분야의 강국이 된 것도 정보화에 유리한 과학적인 글자 한글이 있기 때문이거니와 그런 한글을 국가적으로 기리게 된 것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한글날을 그저 국경일로 기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글의 바탕이 되는 우리말인 한국어를 갈고 닦는 데에 모두가 힘을 쏟아 우리말을 튼튼하게 할 때에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든 보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