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할머니, 그리고 한글
잠이 마구 쏟아지는 5교시다. 하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국어 시간이다. 선생님께서
교과서를 쭉 읽어 나가실 때마다 내 눈꺼풀은 차츰차츰 더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눈이 확 뜨인 것은 선생님께서 교탁을 두어 번 탁탁 두드리시면서……


사랑하는 할머니, 그리고 한글


이 현 비
(대전예술고등학교 1학년)

   잠이 마구 쏟아지는 5교시다. 하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국어 시간이다. 선생님께서 교과서를 쭉 읽어 나가실 때마다 내 눈꺼풀은 차츰차츰 더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눈이 확 뜨인 것은 선생님께서 교탁을 두어 번 탁탁 두드리시면서 새로운 화제에 대해 말씀해 나가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헴. 국어 시간이 아무리 졸린다고 해도 너희들 너무 심하구나. 조금 있으면 559돌 한글날이 찾아온단다. 너희들 그날 헛되이 보내지 말고 한글날 기념 공연을 보거나 한글을 이렇게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세종대왕님을 기리면서 뜻 깊게 보내야 한단다. 알았니? 아까 얼핏 듣다 보니 그날 삼삼오오 모여 노래방 가고 어디 가고 한다던데 그러다가 선생님한테 걸리면 혼나는 줄 알아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다시 수업을 이어 나가셨다. 국어 시간이 끝나고 체육 시간, 과학 시간, 자습 시간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썰렁한 집에는 할머니만 혼자 계셨다. 아버지는 친구 분들과 식사 약속으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동창 모임으로 집을 비우신 상태였다. 그나마 동생도 친구 생일 파티로 나갔으니, 할머니는 외로이 집을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학교 수업으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다녀왔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성으로 던지고 나는 얼른 씻고 내 방 침대에 몸을 벌러덩 눕혔다. 예상은 했다. 할머니는 쫄쫄 내 뒤를 따라 들어오셔서 이런저런 말을 붙이셨다.

   “학교는 재미있었누? 점심은 많이 먹었고? 할미랑 산책 좀 하구 올래?”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체하고 등을 뒤로 살며시 돌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붙이셨다.

   “할미가 감자 쪄 줄까? 고구마가 더 좋누?”    그래도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할머니는 방을 나가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셨다.

   “에구, 그래 이 할미가 그리도 귀찮누? 하긴 이 할미도 많이 늙어서 이 집에서 짐밖에 더 되겠누?”    할머니가 혼잣말로 하시는 말에 나는 알게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 할머니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노인정에 자주 출입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처럼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난 뒤돌아서 천천히 걸어 나가시는 할머니에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기로 하였다. 한글날인데 놀지도 못하고, 세종대왕님의 고마움을 기리고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던 국어 선생님을 불평해 대었다. 난 또 속으로 ‘할머니가 호통을 치시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꾸중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깐 말이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붙이셔서 내가 말을 해 나가면 항상 할머니는 나에게 말은 가려서 하는 것이라며 혼을 내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면서 나는 말을 조심성 있게 하는 법을 배워 나갔지만, 오늘은 국어 선생님의 달갑잖은 이야기 말고는 별다른 화제가 없었기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목이 컬컬하신지 크음 하고 큰기침을 하셨다. ‘아. 이제 또 시작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냄비에서 잘 익고 있을 감자를 떠올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으셨다. 오늘은 무엇인가 달랐다. 한동안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다가 냄비에서 눈을 떼고 할머니 얼굴을 쳐다보자 드디어 말씀을 시작하셨다.

   “현비야. 이 할미랑 한글날 기념식 같이 가보지 않겠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나는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한글날 아침, 나는 큰 후회를 하였다.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해야만 했고, 공휴일의 나른하고 달콤한 늦잠도 즐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와 한 약속이기에 나는 꼭 지켜야만 했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단둘이 즐기는 시간이었다. 세종대왕릉 정자각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퍽 아름다웠다. 역시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달력은 가을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풍경도 예쁜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학교랑 독서실에서 공부에 쫓기는 생활을 한 탓에 제대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 이렇게 뜻밖에 여유로움을 맘껏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할머니가 무척 고마웠다. 세종대왕릉 정자각에 도착해서 한글창극단이 월인천강지곡을 공연하는 것을 감상하였다.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지만, 색색의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의 뜨거운 얼이라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다음은 할머니와 함께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도 보았다. 왜 나도 모르게 이때 가슴 찡했는지 ‘이래서 나도 한국인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이리저리 움직이시면서 다리가 아파 오시는지 가끔씩 큰 숨을 내쉬었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할머니께 죄송스러웠다. 세종대왕의 큰 동상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우리나라의 위대함이 느껴지고 세종대왕님의 고마움도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동상을 보면서 멀거니 서 있었다. 뒤돌아서 가려는데 할머니는 그 자리에 몇 분이고 꼿꼿이 서 계셨다.

   “할머니! 우리 이제 가요.”    할머니는 그제야 발걸음을 떼셨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할머니의 눈시울은 불그레해져 있었다. 영문을 몰라 나는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할머니는 괜찮다며 세종대왕님한테 고맙고 감사해서 그런다며 나를 안심시키셨다. 그러곤 할머니는 입을 떼셨다.

   “현비야! 내가 왜 여기에 니를 데리고 왔는지 아누? 니가 한글의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여기 이렇게 데리고 온 기라. 니도 이 기념식 보면서 가슴이 짠해 오지. 그럼 된 기라. 그런 니도 마이 느낀 기라. 니는 할미맴 모를 끼다. 할미는 어려서는 글이란 걸 몰랐대이.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여자는 그럴 수가 없었대이. 그러다가 나온 게 한글이었대이. 근데 한글은 ‘암글’이라고 불리면서 엄청나게 천시받다가 나중에는 여자들도 배울 수 있게 된 기라. 내는 나이가 다 먹어서 글을 배웠지만, 그래도 이 할미가 지금 이렇게 신문도 볼 수 있고 글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한글 때문이라카이. 내는 세종대왕님한테 진짜 감사한대이.”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비로소 한글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려서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글을 배우시는지 옆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할머니는 ‘가나다’를 우리 어머니에게 배우셨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언어를 배우는 것은 힘들다는 말이있는데, 그 말이 정말 맞는지 할머니는 글 배우는 것을 퍽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글을 읽어 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할머니는 지긋한 연세로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셔서 글을 다 깨우치셨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왜 불그레해지셨는지 그제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글의 중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한글날 기념식에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여기까지 힘든 몸을 이끌고 와 주신 할머니께 감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안에서 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문득, 지난날 할머니가 은행에서 겪었던 일이 기억났다. 하루는 할머니가 돈을 부치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고 한다. 글을 써야 하는데 차마 옆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무엇해서 할머니는 손을 다친 척을 하셨다고 한다. 아프지도 않은 손에 붕대를 친친 동여매고 옆 사람에게 손이 아파 글을 못 쓴다며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설움에 할머니는 한글을 그렇게 악착스럽게 깨우치셨는지도 모른다.
   한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글자! 한글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주었다. 할머니와 함께 기념식에 다녀오면서 나도 한글의 소중함을 깊게 느꼈다. 할머니께 자신감 있는 인생을 선물한 한글……. 나 또한 정말 소중한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하며 잊고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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