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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빵’
김수현(광주 치평중학교)
올해는 중학교 1학년 남학생반 국어를 맡았다. 중학교 2,3학년 아이들만 가르치다가 오랜만에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남학생 아이들을 담임하고 가르치려니 학교생활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많았다. 1분 전에 했던 말도 두세 번씩 반복해 주어야 되고, 수업 시간에는 쉬운 낱말 뜻도 화를 내지 않고 설명해 주어야 하고,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질문에도 나름대로 답을 해주어야 했다.
6월 말쯤의 일이다. 1학기 생활국어에는 ‘국어 생활의 반성’이라는 단원이 나온다. 기말 고사를 앞둔 터라 한 시간은 간단하게 필기시험에 나올 만한 교과서 내용 설명을 하고, 두 시간은 모둠별 과제를 주어 수행 평가에 반영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첫 수업은 평소 까불기로 유명하며, 다른 남학생 반에 비해 조숙한 1학년 4반 3교시 수업이었다. 단원의 길잡이와 소단원을 읽고, 외래어, 은어, 비속어, 유행어의 뜻과 몇 가지 예를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빵과 담배가 외래어라는 설명을 한 후, 두 번째 은어를 설명하고자 담배의 은어가 무엇인지 질문을 했다. 내가 원한 대답은 ‘야리’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은 ‘빵’이었다. ‘아이들이 방금 전에 배운 외래어와 헷갈리고 있나?’, ‘은어 수업을 너무 오랜만에 해서 내가 모르는 빵이라는 은어가 그동안 생겼나?’, ‘우리 학교 아이들만의 은어인가?', '내가 이 순간 ‘야리’라고 우겨야 하나?'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순간 당황했다. 맨 앞에 앉은 공부 잘하고 얌전한 광훈이만이 학원에서 배웠는지 아주 작은 소리로 “야리인데……”라고 속삭였을 뿐, 대부분의 아이들은 “빵! 빵!”하면서 즐거워했다.
일단 당황한 마음을 가다듬고, 담배의 은어를 왜 빵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그냥 아이들이 그렇게 사용한다고 했다. “너 빵 있냐?” 라고 묻고 주고받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고, 반 아이들끼리도 그렇게 사용한다고 했고, 학원에서 친구들이 문제집에 외래어로 설명이 된 ‘빵’ 밑에 ‘담배’라고 써놓은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옆 학교 아이들은 ‘초콜릿’이라고 한다고 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종이 울리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담배의 은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정말 ‘야리’와 함께 ‘빵’이 나왔다. 최근 2,3년 사이에 생긴 은어였다. 은어나 유행어나 모두 변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교사가 되어버렸나 싶어 내 자신이 한심했다. 연이어 있는 다음 반 수업에서는 ‘야리와 더불어 빵도 아는 체 해야지’ 마음먹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3교시 수업에 늦게 들어왔던 4반 찬양이를 데려온다는 것이 그냥 교무실로 와버려서 다시 4반 교실로 향했다. 뒷문에서 찬양이를 부르려는데, 4반의 키 작은 아이들 몇이 칠판에 손을 대고 매를 맞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그 옆에는 현규가 실내화 대신 한 쪽 발에 신발을 신고 발로 엉덩이를 막 차려는 순간이었다. 뭐하는 거냐며 소리를 지르고, 교무실로 아이들을 데려왔다. 때리려고 했던 현규는 전에도 폭력을 사용해 징계를 받았었다. 양쪽의 진술서를 받아보니 국어 수업 시간에 담배의 은어를 ‘빵’이라고 대답한 아이들을 때리려던 중이라고 했다. 정말 기가 막혔다. 수업 시간에 4반 대부분의 아이들이 ‘빵’이라며 즐겁게 외쳤는데, 현규만은 그 모습이 거슬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힘이 약한 아이들 몇을 골라서 국어 선생님께 담배의 은어를 들키게 했다는 이유로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아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교실에서, 복도에서 ‘빵’이라는 은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화가 났고, ‘빵’이라고 외친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어서 때리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서운함과 어이없음과 묘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나름대로 국어 시간에 아이들과 허물없이 터놓고 얘기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현규에게는 ‘빵’이 교사인 내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은어였을까? 오히려 국어 교사가 그것도 모르냐면서 알려줘야 맞지 않나?
‘그것은 화낼 일이 아니다’, ‘선생님이 좀 알면 어떠냐?’, ‘담배 피우는 사실도 이미 아는데, 담배의 은어를 안다고 뭐 달라지느냐?', ‘반 아이들 대부분이 대답했는데 왜 약한 애들만 골라 때리려고 했느냐? 야비하다’, ‘담배를 끊을 생각을 해야지 그런 일로 애들을 패려고 했느냐?’ 등의 얘기를 쭉 했지만, 현규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았다. 시작종이 울려 어쩔 수 없이 아직도 씩씩대고 있는 현규를 교실로 보내고는 점심시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왜 하필 첫 수업이 심란한 4반이었을까? 다른 반 아이들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4반 수업에 담배의 은어인 ‘빵’을 미리 알고 들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규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고쳐줘야 할까? 도대체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시간은 3반 수업이었는데, 벌써 아이들은 4반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현규가 3반의 담배 피우는 아이들에게 국어 선생님이 ‘빵’이 담배인줄 알았으니까 앞으로 ‘빵’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까지 3반의 순진한 아이들은 들려주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3반 수업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다른 국어 선생님들께 담배의 은어를 물었더니 몇 분은 ‘빵’을 알고 계시고, 몇 분은 모르셨다. 점심을 먹고 30분쯤 지나 다시 현규와 이야기를 할 때는 현규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도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이제는 오히려 쉬는 시간 사건으로 또 징계를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고 다음 날 두 번째 시간에는 학생들의 비속어, 은어 사용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많이 나와서인지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친구들의 언어 습관을 자세히 관찰하고 쓴 ‘국어 생활 관찰 일기’까지 끝낸 아이들 대부분은 수행 평가지에 자신들의 국어 생활을 반성하는 글을 솔직하게 썼다. 욕설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몇 명의 아이들도 국어 생활 관찰 일기 속에서는 비속어 사용이 일반적이었다. 현규도 나머지 두 시간은 모둠 아이들과 즐겁게 활동하며 무사히 보냈다. 담배를 둘러싼 은어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수행 평가를 마쳤다.
하지만, 우리말을 해치는 언어와 아이들의 몸을 해치는 담배 사이에서 이루어진 국어 생활의 반성 수업을 끝낸 내 마음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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