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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선(일본 국립대학법인 지바대학 비상근강사 역임)

이 글은 글쓴이가 한국 모 대학의 한국어교원 양성과정 수료식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에서의 한국어 학습 환경을 엿볼 수 있고 글쓴이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열정이 깊게 배어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35일간의 한국어교사 연수과정을 끝내고 뜻 깊은 수료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연수 기간 동안 우리들은 강의와 실습을 통하여 한국어교육의 이론과 교수법을 열심히 배웠으며 한국어교사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양과 자질을 겸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연수의 전 과정을 수료한 우리들은 앞으로 배운 지식을 현장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면서 자질 향상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한다면 학습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유능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연수 기간은 너무나 행복하고 벅찬 나날이었습니다. 연수과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실속 있는 내용이었고 여태까지 풀리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도를 명시해 주었습니다. 또 한국어 교사로서 제게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더 필요한가를 이 기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강 첫날에는 랑그니 빠롤이니 하는 전문 용어의 홍수 같은 세례를 받아 당황하기도 했지만 모든 교과목이 한국어 교사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교양과 지식인 줄 알고 배우기에 힘썼습니다.
  또 연수 기간 동안 친구들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타자를 치려고 6시쯤에 연수소로 가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격으로 벌써 타자를 치는 친구가 있어서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애를 키우면서 아침마다 누구보다도 빨리 교실에 와서 공부하는 친구,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한마음으로 시간을 아끼면서 공부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낯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 서먹서먹하던 우리들이 오늘에 와서는 뜻을 같이 하고 한길을 걸어가는 더 없이 다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사연수 기간에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있었습니다. 말 문제로 낙심도 많이 했습니다. ‘과연 내가 한국어교사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일본어교사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마음이 나약해질 때마다 본토박이 친구들과 함께 배우기 위해 그들의 몇 배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마음 먹은 일을 생각했습니다. 첫째도 노력, 둘째도 셋째도 노력해야 한다고.
  제가 왜 그토록 한국어교사 연수소에 오고 싶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제 가슴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고민을 풀 길이 여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더러 한국어를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신기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제가 우리말을 정규교육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일본 학교에서 민족 차별을 받아 제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한 그날부터 저는 조선사람이 되기 위하여 조선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국어 시간에는 소월의 시도, 상화의 시도, 옛날의 시조와 같은 고전도, 해방 전의 우리나라 문학작품도 배웠고 우리나라 역사도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우리말을 아름다운 언어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민족의 수난을 같이 한 우리말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지내다가 일본 회사에서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끼리 회식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읊기 시작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를 다 같이 읊으면서 밤거리를 거닌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서 자란 곳은 달라도 하나의 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유학생들과 사귀는 과정에 제가 옛날식의 조선어나 북한말은 알아도 오늘날 한국에서 쓰는 한국어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고민은 깊어가기만 했습니다. 본래 대학교에 조선어 교과목이 설정된 것은 학생들의 전공 연구를 위하여 한글로 된 문헌이나 자료를 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업의 중점은 문법이었고 수업도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월드컵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에 대한 관심은 그것에 그치지 않아 한류 붐으로 이어져 '욘사마' 열풍이 주부층에까지 광범위하게 번져갔습니다. 역사상 이런 일이 없었다고 신문에 날 정도의 열기였습니다. 처음엔 ‘이럴 수가’ 하고 인상을 쓰다가도 가만히 생각하니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고정관념으로 '가깝고 먼 나라'로 한국을 외면하고 무시해오던 많은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아는 좋은 기회가 되고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흐름은 상아탑의 교과목까지도 바꾸어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조선어'였던 교과목 이름이 '조선어-한국어'로 변경되고 한국어를 배우자는 학생도 엄청나게 불어나 신학기에 다 교실에 못 들어가서 복도에 넘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담당자의 한 사람인 저는 무능하게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갈피를 못 찾고 속수무책인 상태였습니다. 제가 그때 고민하면서 절실히 바라던 것은 한국어 교수에 능숙한 스승과 선배였고 현장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정보망이었습니다.
  재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더는 교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어디 그런 교육기관이 없을까 찾아 보니 한국의 대학교 여러 곳에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대학교에서 실시되는 교육 기간과 일본 대학교의 여름방학 기간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간 강사의 신분으로 백수가 될 각오 없이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자꾸 지나갔습니다. 수업을 하다가도 한국어교사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는 지경에 빠져 교단을 떠날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이대로 물러 설 수 없다는 생각도 머리 한 구석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교사양성과정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오기 전에 그 나이에 뭘 배우겠느냐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과연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끝까지 제가 어디까지 해 낼 수 있는가를 알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한국어는 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겨 오던 모국어가 아닌 모국어였습니다.
  오늘 수료의 기쁨을 안고 여기 연수소를 떠나게 되지만 연수 기간에 배운 교과목의 내용을 다 제 것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가 한국어 교사로 세계에 나가는 우리 가슴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앞으로 그 씨앗을 잘 키우기 위하여 연수과정에서 굳게 가진 뜻을 잃지 않고 한국어를 더 잘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엿한 한국어교사로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떠나자니 모든 것이 그립게 안겨옵니다. 녹음이 우거진 교정의 아름다운 숲에서 사는 새들처럼 저도 제 마음 속에 한국어의 수풀을 이루고 까치나 부엉이, 다람쥐들처럼 거기에서 살겠습니다.
  우리들을 오늘까지 이끌어 주신 한국어교사 연수소의 존경하는 교수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직원 선생님들께 마음속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연수생들을 위하여 강의를 준비해 주시고 살뜰히 보살펴 주신 선생님들의 사랑과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앞으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2006년 8월 22일
조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