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이해】

방언과 개인어

이태영(李太永) / 전북대학교


  문학 작품을 읽다가 새로운 어휘를 보게 되면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사전에 있으면 표준어로 생각하고, 없으면 방언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작가들의 경우 방언이 아닌 개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서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개인어를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문학 작품을 읽을 때 표준어도 아니고, 지역 방언도 아닌 작가가 만들어 낸 개인어를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에 나오는 ‘애살포오시’란 어휘는 작가가 만든 어휘로 ‘애살포시’의 장음 표기이다. ‘애살포시’는 접두사 ‘애-’에 부사 ‘살포시’가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접두사 ‘애-’는 ‘여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애살포시’는 ‘살포시’보다 훨씬 부드러운 의미를 갖는다. 시인으로서 아주 적절한 어휘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애살포오시 웃음 지우며, 水流와같이 네개의 水流와같이 차라리 흘러가는것이였다.<서정주,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서정주는 표준어 ‘검다’를 ‘검으얗다’로 표현하고 있다. 또 그의 시에는 ‘하이얀, 히부얀’과 같은 표현도 쓰이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는 ‘보얗게, 보오얗게, 뽀얗게, 뽀오얗게, 하얗게, 하이얗게’와 같은 예가 보이는데 문학 작품에서는 율격을 맞추거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된소리나 장음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검으얗다’는 ‘검다’에 ‘하얗다’의 ‘-얗’을 넣어서 ‘검으얗다’를 만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방언이 아니고 개인어라고 해야 한다.
하늘 끝 검우야한 솔무더기 위에는/ 내 學業의 中斷을 걱정하시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반쯤 돌린 야위신 얼굴<서정주: 어느가을날>
네 갈림길에 선 검으야한 소나무가지/ 종노릇 가는 그대 어린것의 길을 가르치는/ 소나무가지를 씻어 비껴가고 있을 때……<서정주: 뻐꾹새울음>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사전에 나오지 않고, 지역 방언에도 쓰이지 않는 많은 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최명희는 국어사전에 없는 어휘인 ‘꽃심, 꽃빛, 꽃각시, 꽃밥, 꽃자줏빛, 꽃니, 꽃시울, 꽃결’ 등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까작까작, 웅수웅숭’과 같이 의성어나 의태어를 나타내는 첩어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최명희는 표준어 동사 ‘메다꽂다’를 쓰는 한편으로 ‘메다박다’란 어휘를 만들어 쓰고 있다.
저녁 까치가 집을 찾아오고 있는지 허공에서 까작까작 소리가 울린다.<최명희: 혼불 1996,1,77>
행랑에서 하인과 머슴들이 웅숭웅숭 내다보고, 안서방네와 바우네는 부엌에서 나온다.<최명희,혼불: 1996,1,248>
시퍼렇게 깎인 대창을 치켜들어 기응의 앙가슴 복판에 콱 메다꽂은 기표는,<최명희: 혼불,1996,7,63>
숨이 막혀 끊어지는 강실이를 여지없이 방바닥에 메다박았다.<최명희: 혼불,1996,6,314>
  작가가 개인적으로 어휘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국어의 규칙을 어기는 것으로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기존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단어를 새롭게 조어하여 만들어 쓰고 있다. 이미 나와 있는 우리의 어휘를 우리 국어의 규칙에 맞게 새롭게 조어하여 아름다운 어휘를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말에 유익하고 맛깔스런 어휘를 보태는 결과를 낳아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어를 방언으로 혼동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 다른 지역의 방언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쓰는 방언과 개인어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나는 개인어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