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한용운의 시 ‘冥想(명상)’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원


아득한 冥想의적은배는 갓이업시출넝거리는 달빗의물ㅅ결에 漂流되야 멀고먼 별나라를 넘고넘어서 이름도모르는나라에 이르럿슴니다 /이나라에는 어린아기의微笑와 봄아츰과 바다소리가 合하야 사람이 되얏슴니다 / 이나라사람은玉쇄의귀한줄도모르고 黃金을밟고다니고 美人의靑春을 사랑할줄도 모름니다 / 이나라사람은 우슴을조아하고 푸른하늘을조아함니다 // 冥想의배를 이나라의 宮殿에 매엿더니 이나라사람들은 나의손을잡고 가티살자고함니다 / 그러나 나는 님이오시면 그의가슴에 天國을미랴고 도러왓슴니다 / 달빗의물ㅅ결은 흰구슬을 머리에이고 춤추는 어린풀의장단을 마추어 우줄거림니다
(‘冥想’, “님의 침묵”, 1926 )
  만해 한용운(1879〜1944)은 그가 생각하는 불교적 이상 사회(理想社會)의 건설을 몇 몇 시에서 불교적인 황금 시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그의 명상 속에서 배를 타고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맨 처음에 나온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는’ 사건을 주목하면, 달빛이 나의 불성(佛性)을 깨우쳐서 내가 불교적 천국에 잠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어린 아기의 미소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하여 사람이 된 곳으로 그 의미는 순수와 따뜻함과 자연이 어우러진 그런 불교의 유토피아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 사람의 성격은 옥쇄의 귀한 줄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첫째로, ‘옥쇄의 귀한 줄을 모른다’는 것은 권력을 휘두르는 데 뜻이 없다는, 즉 권력자가 있으려면 피권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평등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나라 사람은 황금을 밟고 다닌다’. 그것은 재물에 뜻이 없다는 것인데, 마치 토마스 모어(More, Sir Thomas, 영국의 정치가, 1477~1535)의 유토피아 사람들이 황금을 노예의 발에 채웠던 것처럼 사유재산이 없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생필품과 편의품을 충분히 가진다면 더 이상의 욕심이 없는 곳, 즉 사유재산이 없는 공유제의 사회일 것이다. 금과 은이 그 효용가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희소성 때문에 이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완전히 자연에 반하는 쓸데 없는 탐욕에서 연유한다고 토마스 모어는 생각했는데 만해도 마찬가지로 황금을 쓸데 없는 물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은 미인이 주는 쾌락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이 나라 사람은 미인의 청춘에 탐닉하는 욕망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에서 보면 이 나라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며 자연을 사랑함을 알 수 있다.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모든 사회, 모든 국가의 공통된 목표이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토마스 모어에게는 쾌락이다. 그는 쾌락이 ‘인간 행복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이루는 주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어의 쾌락은 그의 종교관과 도덕관에 연유한다. 그에 의하면 쾌락은 종교의 세 가지 원리인 영원 불멸, 인간의 행복을 위한 신의 섭리, 내세에서의 덕의 보상과 죄의 형벌을 인정할 때 옹호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이 원리를 부인할 경우, 인간은 누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쾌락의 추구가 뒤에 고통만을 초래하게 되며, 현세에서의 덕과 선을 쌓기 위한 모든 고행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의 추구는 종교적 원리가 없는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성이 종교의 원리를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쾌락에는 참되고 선량한 욕구와 동기로부터 발생한 것과, 이와 반대로 거짓되고 야비한 욕구로부터 유래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의 추구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범이 요구된다. 쾌락 추구의 적극적 규범은 진정한 쾌락은 자연적,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 본성과 외계의 자연을 가리킨다. 그는 쾌락을 자연적 즐거움을 갖게 되는 육체와 정신의 모든 운동과 상태라고 본다. 또하나 자연에 순응하는 길은 곧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또한 이성은 인간에게 인간애의 발로를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자신의 행복과 복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서 서로 도와줄 것을 명령한다. 이 점에서 종교적 이타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만해의 주의가 모어의 견해와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본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이 시는 전하고 있다. 즉 나만 행복한 나라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님(나를 제외한 중생들)의 가슴에도 천국을 꾸며야 한다는 대승 불교적 이타주의가 잘 드러나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