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옥순 (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1)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2)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 테요/ 3) 五月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꼿닙마져 시드러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4)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 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 (<45>, 『영랑시집』)
  김영랑(1903〜1950)의 시 <45>,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한국인이 즐겨 읊는 시로 손꼽힌다. 동양 문화에서 모란은 황제의 꽃이라 불렸고 중국인은 모란을 매우 사랑하여 모란꽃 아래서 죽는 것을 풍류로 여겼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때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에서 모란이 왕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화왕(모란)이 아첨하는 미인(장미)과 충간하는 백두옹(할미꽃)을 두고 망설이는 이야기는 설총이 신문왕을 깨우치기 위해 지었던 글이다. 동양 문화에서 모란꽃은 이렇게 통치권, 부귀, 공명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모란을 수놓았다. 민속에서는 모란꽃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면 복된 앞날이 있고, 꽃이나 잎이 갑자기 시들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여겼다(『한국문화상징사전』2, 221-2쪽).
  이런 문화 상징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영랑의 시를 다시 읽어 보면 새로움을 느끼게 된다. 영랑의 개인사를 보면 그는 거문고를 뜯으며 모란을 감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가 쓰여진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이 빼앗긴 시기라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모란이 황제의 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꽃이 시들면 시적 화자가 일 년 내내 침통한 분위기에 젖는다는 표현은 의미심장한 상징성으로 다가온다.
  이 시의 시적 화자(시 안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물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이겠지만 시 전체 맥락에서 다시 점검해 보자. 이 시는 4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문장에서 나는 모란이 피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게 드러난다. 둘째 문장에서는 모란이 처연하게 (뚝뚝) 떨어지면 설움에 잠기겠다고 말한다. 셋째 문장에서는 오월 어느날 갑자기 모란이 사라지자 살아야 할 존재 이유가 없어져서 그가 일년 내내 울고 있음을 말한다. 넷째 문장에서는 모란이 지면 절망에 빠지겠지만 그래도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겠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말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일차적으로, 시 속의 말하는 이는 모란꽃을 피우는 일에 목숨을 건 모란꽃 애호가라고 볼 수 있다. 모란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모란꽃이 지면 설움에 잠기는 것은 모란꽃을 기르는 정원사의 극진한 애정 표현이라고 볼 수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를 꽃 애호가나 정원사와 연결시켜 보면 그 집착하는 정도가 과도하다. 모란이 지면 그 남은 세월을 울고 지낼 정도로 모란꽃에 절대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편으로 생각할 때 ‘모란꽃을 기르는 정원사나 모란꽃 애호가’의 입장이 아니라 모란꽃을 기르는 ‘뿌리’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뻗쳐 오르든 내 보람’이라는 표현도 일반 평자들이 말하듯이 이 시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강한 표현이라는 평도 상관없게 된다. 뿌리가 줄기에 자양분을 뻗쳐 올려야 잎사귀와 꽃잎이 자란다는 사실은 모란꽃의 자연스러운 생장 과정이므로. 모란꽃의 삶과 모란 뿌리의 삶이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유기체적 관계라고 보면 ‘나’라는 말하는 이의 지극한 기쁨과 슬픔이 모란꽃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수긍이 가게 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느낄 때만이 시인이 되라고 릴케(Rilke, Rainer Maria, 1875~1926)가 말했던가. 마찬가지로 모란꽃을 피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시인의 절실함은 이 시에서 그의 ‘존재 이유’로 부각되고 있다.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예술품을 만들고 빛나는 예술품으로만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기듯이, 한 민족이나 백성은 왕이나 대통령이 존재하는 국호 있는 나라가 있어야만 있음의 명분이 생기듯이, 모란꽃 뿌리가 자양분을 길어 올려 모란을 피워야만 존재의 이유가 생기듯이, 있다고 해서 다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음의 이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있게 된다. 땅속에 감추인 ‘모란꽃 뿌리’로서의 삶을 우리의 일생이라고 한다면 정말 우리가 갈구하는 모란꽃으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고 우리는 과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 그 대응 관계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모란 뿌리- 예술가 - 한 사람의 일생   - 한 민족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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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 - 예술 작품 - 가장 가치있는 무엇 - 국호(왕, 대통령) 있는 나라 - 있음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