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고정희의 시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 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 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 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 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지리산의 봄”, 1987, 1994)

  고정희(1948〜1991)의 시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의 소재가 된 지리산   뱀사골을 잠깐 소개한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계곡으로 반야봉에서 반선까지 지리산 북사면을 흘러내리는 길이 약 12km의 골짜기를 일컫는다. 전 구간이 기암절벽으로 구성된 이 계곡은 넓은 암반과 100여 곳의 크고 작은 폭포와 늪, 맑은 연못이 줄을 잇는데, 봄에는 철쭉꽃, 가을에는 단풍, 여름에는 녹음 짙은 계곡 안에 삼복더위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감돈다고 한다.
  연필로 처음에 윤곽선을 그리듯이 이 시를 그린다면 뱀사골의 윤곽선은 빛의 이미지로 타난다. 면을 색칠한다면 그것은 협곡의 물, 거대한 여울, 샘물 등에 해당한다. 이 빛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를 통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뱀의 모습이 나타난다.

비유되는 것 비유하는 것
뱀사골
뱀눈은 작고 하얗게 빛난다 -----------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
나무가지에 걸려 있다가 -----------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뱀 대가리를 일으켜 세우고 -----------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둥글고 긴 몸통으로 기어다닌다 ----------- 길게 내려온다
찬 피 동물 ----------- 축축한 외로움, 서늘한 향기
봄에 허물을 벗는다 -----------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 -----------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승천

  이 시에서 화자는 지리산이나 뱀사골을 ‘나’라는 일인칭 화자로 말하고 있는데 이 말하는 이는 보통의 여인이 아니라 지리산에 사는 모든 생물을 낳고 기르고 죽게 하는 대모신(Great Mother)의 이미지이다. 지리산신(山神)은 예로부터 마고성모,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 등의 이름을 지닌 여성으로 알려져 왔다. 이 시의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같은 표현들에서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대모신의 모습이 나타나고 지리산신녀의 살과 뼈, 모세혈관으로 비유된 지리산 뱀사골의 형상(흙, 바위, 시냇물 등)이 드러난다.
  이무기가 승천하지 못하고 죽어서 뱀사골(-死-)이라는 명칭이 되었다는 전설처럼 이 시에서는 지리산신녀, 뱀-이무기, 상징적으로 30살 넘은 시인의 염원들이 다층적으로 비유되고 있다. 축축하고 어두운 땅과 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전반부의 뱀사골은 후반으로 넘어오면 어둠의 허물을 벗어버릴 정도의 맑은 샘물과 빛의 작용으로 인하여 더운 것으로, 빛으로 승천하는 신화적 결말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육천 매듭 풀려 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에서부터 보면, ‘육천’이라는 단어의 뜻풀이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간다는 여섯 개의 하늘”에 해당한다고 볼 때 허물을 벗고 승천한다는 뱀-이무기-용의 이미지는 변신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 변신의 이미지는 지리산과 육이오 전쟁의 슬픈 역사 현장을 생각할 때는 죽은 자들에 대한 복권의 의미로, 빛(신)을 따라서 심신을 닦으며 평생 살아온 시인 고정희에게는 깨달음의 성취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시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시인이 1991년 여름 지리산 등반 도중 폭우를 만나 세상을 떠난 장소가 뱀사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