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발음법의 이해]

발음과 표기
- 용언의 활용형에서 -

최헤원(崔惠媛) / 국립국어연구원

  한글은 글자 하나가 음소 (音素) 하나를 표시하는 음소 문자이다. 음소 문자인 한글은 글자의 조합으로 숱한 음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한글 음소를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음절 조합은 모두 7,581개(초성 자음 19개×중성모음 21개×종성 자음 19개)가 되는데 종성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겹받침까지 고려한다면 음절 조합의 수는 더 커진다.
  물론 이 모든 음절 조합이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된소리 자모(ㄸ, ㅃ, ㅉ 등)는 종성에서 쓰이지 않는 등 우리는 음절 조합 가운데 국어 생활에 알맞은 것들을 취하여 쓰고 있다. 이렇게 한글은 우리가 쓰지 않는 말까지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그릇이다. 하지만 정작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는 발음을 표기할 만한 글자가 없는 경우가 있다.
  용언의 어간말 음절이 모음으로 끝나고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이어 나오면 모음 충돌이 일어나 ‘껴(←끼어)’,   ‘미뤄(←미루어)’, ‘그려(←그리어)’와 같이 어간 모음이 반모음으로 발음된다. 또한 이 발음은 표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어간 모음이 ‘ㅟ’로 끝나고 모음 어미가 오는 경우에도 실제 발음에서는 어간 모음이 대체로 반모음화된다. 그러나 모음이 축약된 형태는 표기에 반영되지 않고 모음 어미가 그대로 이어지는 표기만이 인정된다.

여행 가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
이제 집에 가서 쉬어.
아이를 그만 자리에 뉘어라.
누가 방귀를 뀌었어?
  ‘ㅟㅓ’를 한 음절로 발음하는 것을 ‘ᆑ’(음성 기호로 [ɥə])로 표기하기도 하는데(이 자모는 ‘ᆄ’와 함께 실제 15세기에 존재한 글자이기도 하다), 한글 맞춤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ㅟ’와 ‘ㅓ’가 결합되어 반모음화가 일어난 발음을 표기할 도리가 현재로서는 없는 것이다. 또한 한글로 적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발음은 표준 발음으로도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글말이라는 것은 입말을 표현하고 담는 그릇인데 그릇이 작아 내용물을 덜어 낸 셈이 되었다.
  ‘ㅟ’와 ‘ㅓ’의 결합 이외 ‘띄+어[뗘], 틔+어[텨], 희+어[혀]’ 결합(굳이 문자로 표기한다면 ‘뜨ㅕ, 트ㅕ, 흐ㅕ’로 쓸 수 있겠다)에서 보이는 반모음화도 어간의 ‘ㅢ’와 어미 두음 ‘ㅓ’가 표기상 한 음절로 합쳐질 수 없어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지 않은 예이다.
  이와 달리 ‘부어(붓다)’, ‘그어(긋다)’, ‘구워(굽다)’ 등은 ‘붜(얼굴이 붰다, 잔뜩 있네)’, ‘거(밑줄 거라)’, ‘궈(꿩 먹은 소식)’ 등과 같이 발음도 되고 이를 표기할 수도 있지만 현재 한글 맞춤법과 표준 발음법에서는 그 축약형을 표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몇몇 용언 활용형의 축약형이 인정되지 않는 현상은 발음을 표기할 마땅한 글자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한글 맞춤법 규정 자체가 문어적 보수성을 띠는 데에서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