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의 시 “땅의 사람들 9 --사랑”
①월정사 부처님처럼/ ②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③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④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⑤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⑥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⑦오대산 구상나무 숲을 적시고/ ⑧우수수 우수수수수/ ⑨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⑩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⑪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⑫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⑬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⑭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⑮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⑯아....../ ⑰신록으로 꽉찬 오월 언덕에서/ ⑱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⑲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땅의 사람들 9 --사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94)
고정희(1948〜1991)의 시 “땅의 사람들 9−사랑”를 읽으면 오대산 월정사에 퍼지는 봄의 교향악이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그 봄의 교향악은 이 짧은 시 속에서 월정사 부처님과 말하는 이(시적 화자), 시간의 이동(밤→새벽→아침), 공간의 수직적 이동(하늘→숲→풀잎)과 같은 여러 가지 악기들이 연주하는 장엄하고도 비극적인 하모니 속에 잘 나타난다.
시 속에서 말하는 이는 마음을 비우고 잠이 든다. 왜 마음을 비웠을까? 부처님 곁에 오니까 저절로 마음이 비워졌을까? 아니면 자신의 슬픔을 월정사 부처님께 의지하여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아마 후자일 듯 싶다. 편안하게 마음을 비우고 잠이 든 상태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잠을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의 눈물과 비교되는 밤비는 오대산에 큰 사건을 일으키는데 밤비는 다음과 같은 시간 이동의 일부이다. “②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⑩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⑱햇빛 묻은 미루나무”와 같이 뒷말을 꾸며주는 가운데 ‘밤→새벽→해 뜬 아침’으로 전개된다.
말하는 이는 흥미롭게도 “①월정사 부처님처럼/ ②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에서 나타나듯이 부처님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비유하는 것) 월정사 부처님 | ------┊------- | 말하는 이(비유되는 것) |
공(空) 사상을 가지고 | ------┊------- |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 |
오대산 벌판에 | ------┊------- | 마음 저켠 벌판에 |
비가 | ------┊------- | 눈물이 |
부처님 발목 밑으로 | ------┊------- | 내가 잠들지 못하는 동안 |
새벽 풀잎옆(땅)에 | ------┊------- | 사랑(꽃), 이슬(꽃)로 |
오랑캐꽃, 은방울꽃, 초롱꽃,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 ------┊------- | 피었다 |
월정사 부처님의 | --------------- | 나(말하는 이)의 |
┆ | ╳ | ┆ |
오대산 꽃 | ---------------- |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