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기형도의 시 '빈 집'

김 옥 순[金 玉 順] / 국립국어연구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 집’, 『현대시 세계』봄호, 1989.)
   기형도(1960-1989)의 시 ‘빈 집’처럼 실연(失戀) 당한 절망적 상태를 끔찍하고도 철저하게 표현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짧은 제1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짧은 제3연의 2구인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앞에서는 잃어버린 사랑이 뒤에서는 어떻게 빈 집에 갇혔다는 말인가? 사랑의 추억은 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을 띠고 있는 것인데, 이 시에서는 사랑을 잃은 절망의 감정을 집이란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추억을 보관하려면 집 한 채가 필요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서정적 자아가 실연당한 대상과 관련된 모든 배경들 --계절, 날씨, 방안의 모습, 자기 내면의 상태--을 집 한 채에 담아 놓고 열쇠로 문을 잠그는 행위와 연결된다.
   그런데 그 집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집인가? 도봉구 혹은 은평구와 같은 현실에  있는 집인가? 제2연에서 서정적 자아가 이별하는 집은 겨울 밤, 창밖에는 안개가 떠돌고, 서정적 자아가 촛불을 켠 채 쓰라린 각오를 흰 종이에 담아 내는 눈물과 열망이 있던 공간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 집은 단순한 위치나 가구 배치를 넘어서서 잡을 수 없는 계절과 날씨와 자아 내부의 끓어올랐던 욕망과 상처가 뒤섞인 추억의 집임을 알 수 있다.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사랑을 기억 저 멀리 내밀한 집에 가두어 두고 떠남으로써 자신의 의식에서 깨끗이 지워 버리고 있다. 이 기억의 집과 자아가 완전히 헤어지는 과정을 ‘장님처럼 나 이제 문을 잠그네’에서 잘 보여준다. 서정적 자아의 사랑은 내밀한 무의식의 집에 담겨 더 이상 서정적 자아의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그래서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서정적 자아가 이별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  서정적 자아가 ‘잘 있거라’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형으로 떠오른다. 먼저 서정적 자아의 사랑은 겨울 밤처럼 짧았음을 알 수 있다. 겨울 밤의 이미지가 춥고 어두움을 생각할 때, 춥고 어두운 겨울과 같은 상태에서 아마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을까(2-1), 그리고 겨울 안개처럼 (연인의) 창밖을 떠돌지 않았을까(2-2), 그리고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랑은 촛불처럼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지 않았을까(2-3), 그리고 그 연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공포를 느끼면서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2-4), 매번 망설이면서 사랑의 고통 속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2-5), 그러고나서 그 사랑을 얻을 것이라는 열망 속에 살지 않았을까(2-6) 짐작된다. 이렇게 2연을 통해 ‘겨울 밤’에 시작된 사랑은 서정적 자아의 잃어버린 ‘열망’으로 끝난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지금,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에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기억의 집에 담아 무의식의 저 너머로 넘겨 보내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글쓰기를 통한 성공적인 사랑의 정리 작업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에서 나타나듯이 세상을 볼 시력을 잃어버린 장님과 같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겨울 안개 속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던 사랑은 이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무의식의 그 집을 자물쇠로 채우고 의식에 있을 사랑과 관련된 공간(집)을 빈 공간(집)으로 바꾸는 변이를 보여 주면서 사랑을 잃는 것이 얼마만큼 끔찍한 사건인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