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발음법의 이해]

'ㄹ'의 발음

김 선 철(金 鐥 哲) / 국립국어연구원

    자음 가운데 ‘ㄹ’처럼 다양하게 다른 소리에 변화를 일으키거나 스스로 변화를 겪는 소리는 없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ㄴ]으로 변하고, 또 다른 때에는 ‘ㄴ’을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동화시킨다. 엉뚱하게 ‘ㄱ’을 [ㅇ]으로 만들기도 하고, ‘ㅂ’을 [ㅁ]으로 바꾸기도 한다. 어두에서는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물론 북한어를 제외한 남한어에 국한된 현상이기는 하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발음의 전통이 일부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ㄹ’이 [ㄴ]으로 변하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받침 ‘ㅁ, ㅇ’ 뒤에 오는 ‘ㄹ’은 [ㄴ]으로 소리 난다. ‘담력[담:녁], 대통령[대:통녕], 강릉[강:능]’ 등에서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런 ‘ㄹ’이 오히려 제 음가대로 발음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종로’는 [종노]가 국어 고유의 발음인데 [종로]라고 한다든지, ‘심리’를 [심니]로 하지 않고 [심리]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종종 목격된다.
    둘째, 받침 ‘ㄱ, ㅂ’ 뒤에 연결되는 ‘ㄹ’도 [ㄴ]으로 소리 난다. ‘각론[강논], 폭리[퐁니], 협력[혐녁], 합리적[함니적]’ 등이 그 예이다. 역시 주로 젊은이들이 이를 [강론], [퐁리], [혐력], [함리적] 등으로 잘못 소리 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영어 등 서양어의 영향이라거나, 맞춤법의 영향 즉 철자식 발음이라는 등의 추측이 가능하지만 어느 것이든 입증되기는 어렵다. 여하튼 모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셋째, ‘ㄹ’의 앞이나 뒤에 오는 ‘ㄴ’은 [ㄹ]로 변하는 것이 규칙이나, 여기에 대한 예외로서 ‘ㄹ’이 [ㄴ]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들은 사전에서 일일이 확인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생산량, 공권력’의 발음은 규칙에 맞추자면 각각 [생살량, 공꿜력]이어야 하지만 언중의 실제 발음이 대부분 [생산냥, 공꿘녁]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사전에 이렇게 표시되어 있다. 이런 예외가 발생하는 이유는 ‘ㄹ’ 앞의 단어가 어느 정도 자립성을 가지는 한자어라는 점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즉 자립성이 강하기 때문에 ‘생산’, ‘공권’라는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으려 하고, 따라서 뒤에 오는 ‘ㄹ’을 앞의 ‘ㄴ’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로 추정하는 것이다.
    ‘ㄴ’이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발음되는 현상은 한자어 명사 ‘대관령[대:괄령], 난로[날:로]’ 등에서, 그리고 고유어 명사 ‘칼날[칼랄], 줄넘기[줄럼끼]’ 등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다. 겹받침 용언의 활용형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뚫는’의 발음은 [뚤른]이고, ‘핥느라고’의 발음은 [할르라고]이다. 어절의 결합에서도 이런 현상이 보이는데, 물론 한 마디로 발음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집에 갈 남학생’은 [지베갈람학쌩]이고, ‘바람잦을 날’은 [바람자즐랄]이다.
    ‘ㄹ’이 ‘ㄱ’을 [ㅇ]으로, ‘ㅂ’을 [ㅁ]으로 바꾸는 현상은 ‘각론[강논], 폭리[퐁니], 협력[혐녁], 합리적[함니적]’ 등의 예에서 이미 보았다. ‘각론’이 [강논]으로 소리 나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를 거치는 듯한데, ‘ㄹ’이 먼저 변하고 ‘ㄱ’이 나중에 변하는 [각논] → [강논]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 [강론] → [강논]인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