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과 햇살
우리말에서 ‘그해에 난 어떤 것’을 가리킬
때는 주로 접두사 ‘햇-/해-’가 쓰인다. ‘햇감자, 햇과일,
햇곡식, 햇나물, 햇병아리, 햇솜’과 같이 어떤 명사의
첫음절이 ‘햇-/해-’ 뒤에서 된소리로 변하거나 ‘ㄴ’
소리가 덧날 때는 ‘햇-’을 쓰고, ‘해콩, 해팥’과 같이
발음에 변화가 없으면 ‘해-’를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해에
새로 난 쌀’을 가리키는 말은 무엇일까? 흔히들 그 말을 [해쌀/핻쌀]로
말하고 ‘*햇쌀’로 적는 경우가 있으나 잘못이다.(‘[ ]’속은
표기가 아니라 발음임을 나타냄.) 우리말에서 [해쌀/핻쌀]로
소리 나는 말은 ‘해가 내쏘는 광선’을 뜻하는 ‘해(日) +
ㅅ(사이시옷) + 살’로 이루어진 말이므로 ‘햇살’로
적어야 한다.
‘그해에 새로 난 쌀’을 가리키는 말은 바로 [햅쌀]이다.
이 말에는 ‘해-/햇-’과 ‘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ㅂ]
소리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왜 유독 이 말에서만 [ㅂ]
소리가 덧날까? 그리고 [햅쌀]을 한글 맞춤법에 맞게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먼저, 한글 맞춤법 제31항을 보면 ‘두 말이 어울릴
적에 ’ㅂ‘ 소리나 ’ㅎ‘ 소리가 덧나는 것은 소리대로
적는다’고 하였으므로 [햅쌀]은 ‘햅쌀’로 적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쌀’이 뒤에 들어간 복합어에서
유난히 [ㅂ] 소리가 많이 덧나고 있음을 다음 예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는 잘못임을 나타냄)
(1) ㄱ. | 멥쌀(*메쌀) ∼ 메밥, 메벼, 메밀, 메조 | ※메- : (접두사) 찰기가 없는 |
ㄴ. | 입쌀(*이쌀) ∼ 이밥 | ※이(<니) : 예전에 ‘메벼, 입쌀’을 뜻하던 말. |
ㄷ. | 좁쌀(*조쌀) ∼ 조밥 | ※조 : (명사) 곡식의 하나(粟) |
ㄹ. | 찹쌀(*찰쌀) ∼ 찰밥, 찰옥수수, 차조 | ※찰- : (접두사) 끈기가 많은 |
ㅁ. | 햅쌀(*해쌀) ∼ 햇감자, 햇과일, 햇나물 | ※햇- : (접두사) 그해에 난 |
‘메밥, 조밥, 찰옥수수, 햇과일’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ㅂ] 소리가 왜 ‘쌀’과 결합한 말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쌀’의 옛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쌀’은 다음과 같이 옛 문헌에서 ‘’로 나타난다.
(2) ㄱ. | 그 짓 리 가져 나오나≪석보상절(1447) 6:14≫ |
ㄴ. | 나날 太倉앳 닷됫 내야≪두시언해(1481) 초간본 15:37≫ |
ㄷ. | 양 아마다 두 줌 드리라 야 쥭 먹 시 고≪번역소학(1517) 7:14≫ |
문헌에 나타난 ‘’[米]은 [s'Λl]이 아니라 [psΛl]을 나타낸 것으로 초성으로 쓰인 ‘ㅄ’은 소위 어두자음군이었다. 어두자음군이란 인구어의 ‘strike, spring, break, cry, play’처럼 단어의 첫머리에 자음이 둘 이상 연속되는 것을 말한다. 현대국어에서는 어두자음군을 찾아볼 수 없으나 옛말에서 ‘米’의 뜻을 나타내는 ‘’은 단어의 첫머리에 자음 두 개가 연속되었던 것이다. 이 ‘’이 ‘니, 조ㅎ(粟), ’ 등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 바로 ‘입쌀, 좁쌀, 햅쌀’이다.
(3) ㄱ. | 니 + → 니 > 입쌀 |
ㄴ. | 조ㅎ + → 조 > 좁쌀 |
ㄷ. | + → > 햅쌀 |
옛말의 ‘’은 어두의 [ㅂ] 소리가 사라지면서
현대국어의 ‘쌀’로 변화했지만 ‘입쌀, 좁쌀, 햅쌀’과
같은 복합어 속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글
맞춤법에서는 바로 이 [ㅂ] 소리를 반영하여 ‘입쌀, 좁쌀,
햅쌀’과 같이 ‘ㅂ’을 밝혀 적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두 말이 어울릴 적에 [ㅂ] 소리가 덧나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있다.
(4) ㄱ. | 댑싸리 ← 대(竹) + 리(>싸리(荊) | ㅁ. | 부릅뜨다 ← 브르- + -(>뜨-(開)) |
ㄴ. | 볍씨 ← 벼(禾) + (>씨(種)) | ㅂ. | 휩쓸다 ← 휘- + -(>쓸-(掃)) |
ㄷ. | 입때/접때 ← 이/저 + (>때(時)) | ㅅ. | 휩싸다 ← 휘- + -(>싸-(包)) |
ㄹ. | 몹쓸 ← 몯(>못) + -(>쓰-(用)) + -ㄹ(관형사형 어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