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현장에서]

좋은 말만 나오는 텔레비전

손 범 규(孫 範 奎) / SBS 아나운서

      작년 한 해 우리 사회에는 많은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나 말도 있지만 상당수의 말들은 올해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나 방송, 신문에 사용될 것 같다.
      한 광고의 출연자는 ‘좋은 뉴스만 나오는 텔레비전’을 애타게 찾는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해 가끔은 뉴스를 전하는 직업이 싫을 때도 있지만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좋은 일만 가득한, 살기 좋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국적불명의 말도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2003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말은 아래와 같다.

‘검사스럽다, 패널스럽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스터디룸펜, 세일던트, 카파라치, 쓰파라치, 주파라치, 얼짱, 몸짱, 쿨하다’
      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에 붙여 사용한 ‘-스럽다’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이름 뒤에도 붙어 ‘대중스럽다, 영삼스럽다, 놈현스럽다, 부시스럽다’와 같은 말도 만들어냈다.(자세한 뜻은 더 이상의 확산을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덧붙이지 않는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경제 상황은 서글픈(?) 줄임말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놈’이라는 뜻의 ‘오륙도’와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이 먼저 등장했고 ‘38세가 마지막 선’이라는 ‘삼팔선’에 이어 얼마 전부터는 ‘20대의 태반은 백수’라는 ‘이태백’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외래어 합성어도 만들어졌다. 미래가 불투명한 직장을 그만두고 각종 시험(한의대, 의대, 사법고시 등)을 준비하는 30대를 가리키는 말인 ‘스터디룸펜’과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직업이나 진로를 준비하는 ‘세일던트’가 그것이다. ‘스터디룸펜’은 ‘스터디(study)’와 ‘룸펜(lumpen)’의 합성어이고 ‘세일던트’는 ‘세일즈맨(salesman)’과 ‘스튜던트(student)’의 합성어이지만 인터넷이나 방송, 신문에만 등장하는 말이다. ‘파파라치(paparazzi, 유명인을 뒤쫓아 다니는 프리랜서 사진사들)’라는 단어는 ‘카파라치, 쓰파라치, 주파라치’ 등의 많은 직업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런 무분별한 합성어는 각 방송사의 대표 뉴스의 제목이나 기자의 보도 내용, 신문 기사에도 버젓이 등장한다.
‘쓰파라치, 쓰레기 찰칵’ ○○○, 뉴스데스크, 2003/08/02
‘酒파라치 폐해 불보듯’  ○○신문, 2003/11/4
      요즘 너무 많이 사용되는 ‘얼짱’이라는 말은 ‘몸짱, 노래방짱, 운동짱’ 같은 합성하면 만능이 되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원래 ‘짱’이라는 단어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1990년대 중·후반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은어로, 우두머리를 뜻하는 ‘장(長)’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역시 경음화를 좋아하는 최근의 추세에 맞게 ‘장’이 경음화되면서 최고를 뜻하는 의미까지 덧붙여 ‘짱’이 됐고, 뒤이어 ‘대단히’를 뜻하는 부사로도 사용돼 ‘짱 싫어’ ‘짱 맛있다’처럼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쿨(cool)’은 문화계 전반의 화두가 됐다. 이 짧은 형용사에는 ‘냉정한, 서늘한, 뻔뻔한, 침착한, 훌륭한, 가벼운, 천박하지 않고 세련된, 감정이 절제된, 열정과 감각은 있지만 너무 흥분하지 않는…’과 같은 많은 뜻이 내포돼 있다. 방송, 광고, 공연, 영화 등 모든 분야에서 ‘쿨’은 성공의 척도가 됐고, 인간 관계에서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이 됐다.
      이런 말들은‘랭귀지 디바이드(Divide)’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모두 우리말을 쓰고 있지만,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가 많아져서 같은 세대끼리는 당연히 통하는 단어가 다른 세대에게는 외국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현상은 인터넷에서 먼저 사용되고 다른 대중 매체로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 또 수용자의 경향이나 흐름을 따라간다는 이유로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점차 사용이 잦아지는데, 올 한해는 이런 이상한 신조어들을 보고 들을 수 없는 방송과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