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조지훈의 시 '花體開顯(화체개현)'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波 動(파동)! 아 여기 태고(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석류 꽃이 물들어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花體開顯(화체개현)' )

조지훈(1920~1968)의 시 '화체개현'에서는 햇살의 신비 체험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인가 작업하느라 밤을 새운 시인에게는 여름밤이 짧기만 하다. 밤새 켜 놓은 촛불이 다 닳기 전에 새벽 동이 트면서 햇살이 섬돌 위로 올라온다. 햇살의 구체화된 형상이 석류꽃이다. 몽우리졌던 꽃의 피는 모습, 자라는 모습을 고속 촬영한 것을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로 보면 꽃이 순식간에 전속력으로 연속적으로 피어난다. 전신의 힘을 다하여 그동안 준비했던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여자가 잉태했던 아이를 전신의 힘을 다하여 낳는 과정에서 양수(최초의 물)가 터지면서 양수로 보호되었던 아기가 세상에 탄생하는 것 같다. 여성의 자궁 속 양수는 뱃속의 아기에게는 태고 적 바다의 소리없는 물로서 막혔던 바닷물이 물보라로 터지는 것처럼 터져 신생아를 스치는 것이다. 해에 관한 말은 한 구절도 나타나지 않지만, '해돋이'는 '꽃 피기'와 '아이 낳기'의 비유를 거쳐 시인의 창작하기로 이미지가 흘러간다.

<아기 낳기> <꽃 피기> <해 솟기> <창작하기>
최초의 물인 석류가 새벽 내가
양수가 꽃망울 동이 (상상력을)
터져 터져 펼쳐
아기가 꽃잎이 햇살이 (작품을)
탄생한다 생긴다 펼쳐진다 낳는다

아기를 낳기 전, 고통스럽고 힘든 가운데 새 생명을 잉태하려 애쓰는 것은 마치 고대 신화에서 바닷물이 갈라져 우주가 열리는 그런 힘든 체험과 같고, 해가 새벽이 오면 다시 동이 트려고 전력을 다해 조금씩 조금씩 하늘로 솟아 올라 온 우주를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새벽 동이 터서 펼쳐진 햇살은 꽃잎의 개화로 비유된다.
    '태고 적 바다의 소리없는 물보래'란 비유는 바닷물 자체의 비유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방죽을 터서 사정없이 순식간에 흘러 넘치듯이 햇살이 펼쳐지는 과정, 꽃잎이 펼쳐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아기를 보호했던 양수처럼 태고 적 바다가 보호했던 어떤 대상을 밖으로 펼쳐지게 하는 어떤 강한 힘의 파동으로 비유된 것이다. 아침 해가 솟아올라 그 빛살이 만물을 환히 비추는데 방 안에 있는 시인에게는 바닷물결의 파동으로 확산되어 물보라가 방안으로 스며들어 온 방을 적시듯이 햇살이 방안에 확산되는 모양을 석류꽃의 개화 이미지와 결합하여 표현한다. 햇살이 물보라처럼 퍼지면서 아름다운 석류꽃 모양으로 퍼져 그 안에 시인인 내가 들어 앉게 된다.
    이 시에서 해돋이는 단순한 일상사가 아니라 '잉태'의 사건이자 '꽃 피우기'란 태초의 창조적 행사가 반복되는 신화적 축제의 순간이다. 시간적으로는 밤에서 아침으로의 전환이고, 공간적으로는 밤새 방 안을 밝힌 촛불의 이미지가 방 밖에서는 온 지구를 비추는 아침 햇살의 거대한 빛의 이미지로 확산된다. 해의 이미지는 이렇게 '불의 이미지→물의 이미지→꽃의 이미지'가 결합된 총체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다. 밤새 밝힌 촛불의 에너지는 해돋이의 거대한 에너지와 결합하여 태고 적 바닷물의 세력으로, 석류꽃의 피어나는 힘으로 다가와 그 에너지가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의 몽환적인 신비 체험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