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윤동주의 시 '눈 오는 地圖(지도)'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窓밖에 아득히 깔린 地圖위에 덮인다. 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壁과 天井이 하얗다. 房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1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地圖',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1. 3. 12.)

윤동주(1917-1945)의 시 '눈 오는 地圖'를 읽으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러시아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조선인들의 유랑 생활의 기록을 떠올리게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이자 시적 화자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대상인 '순이'가 바로 그 대표적인 유랑민으로 짐작된다. 그 단서는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는 구절이다. 화자는 순이가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에서 머물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조선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으로 사라졌다. 순이의 떠남이 바로 조선의 역사를 구성하는 백성이 사라짐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 윗 구절 "함박눈이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위에 덮인다."를 보면 눈이 내리는 것이 슬픈 것이라는 직유적 표현이 다분히 감정적이다. 그런데 눈이 '지도 위에 덮인다'는 표현은 비유적이다. 눈이 창밖 거리에 덮일 수는 있어도 그 풍경이 지도는 아니므로. 지도는 기호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구 표면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평면 그림이니까 엄밀히 말해서 논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화자가 지도를 펴 보듯이 창밖의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것은 순이의 발자국을 추적하기 위함이다. "방안을 돌아 보아야 아무도 없다......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에서 알 수 있듯이 방은 이미 방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화자의 의식 속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화자의 눈길은 순이의 발자국을 쫓아 눈이 내리는 지도를 더듬어 간다. 지도와 편지는 함께 연결되는데 편지 봉투에 어느 거리→어느 마을→어느 지붕밑인지를 적어야 편지가 순이에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지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화자는 순이가 가는 곳을 모르므로 그녀에게 부칠 편지는 화자의 마음 속에만 남아 있게 된다. 결국 순이에게 일러 둘 말이 적힌 편지는 순이가 사는 지붕밑으로 가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순이를 찾아갈 방도가 한계에 부딪힌 시적 화자는 상상력의 세계를 통해 순이의 발자국을 쫓아간다.
    이 시에서 '내리는' 눈은 화자가 순이 발자국을 쫓아가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노릇을 했다. 그런데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핀다'는 아름다운 비유법이 탄생하면서 눈은 순이 발자국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협조자로 바뀐다. 발자국 자리마다 눈이 덮였다가 다시 눈이 녹으면 그 자리에 꽃이 핀다는 상상력은 마치 겨울 보리를 심은 땅에 눈이 덮였다가 봄에 눈이 녹으면 보리싹이 트는 '재생의 원리'와 같다. 이 비유는 앞에서 나타난 집 잃고 유랑하는 순이와 잃어버린 역사에도 다 걸린다.

순이 발자국이 ---------- 겨울 보리가 ---- 잃어버린 역사가
└------------------- 눈에 덮였다가 --------------┘
┌------------------- 봄이 오면 --------------┐
꽃이 핀다 ----------- 싹이 튼다 ---- 다시 역사의 자리를 찾는다

눈이 가져오는 재생의 기능은 이 시 전체를 꿰뚫어 집을 잃고 유랑하는 순이의 발자국을 재생의 발자국으로 바뀌게 한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순이가 떠나는 데에서 시인은 변증법적인 상상력을 통해 순이를 찾아가는 지도를 발견한다. ①순이가 떠난다.(━) ②순이의 발자국이 남는다(╋) ③ 순이 발자국 위에 눈이 덮인다.(━) ④눈 밑에서 발자국이 싹 트고 꽃이 핀다(╋) ⑤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선다(╋) 눈은 이제 순이의 발자국을 찾게끔 꽃을 피우게 하는 협조자이므로 화자는 마음 속에 1년 열두 달 하냥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