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김수영의 시 '敵(적)'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더운 날/ 敵(적)이란 海綿(해면)같다/ 나의 良心(양심)과 毒氣(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 吸盤(흡반)같은 나의 大門(대문)의 명패보다도/正體(정체)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敵(적)이 꺼진다// 金海東(김해동)―그놈은 항상 약삭빠른 놈이지만/ 언제나/ 部 下(부하)를 사랑했다/ 鄭炳一(정병일)―그놈은 內心(내심)과 正反對(정반대)되는 행동/ 만을 해왔고, 그것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더운 날/ 敵(적)을 運算(운산)하고 있으면/ 아무데에도 敵(적)은 없고//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 모양으로/ 나의 過去(과거)와 未來(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敵(적)이 어디에 있느냐?」/「敵(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過速(과속)을 범하는 運轉手(운전수)에까지 / 나의 敵(적)은 아직도 늘비하지만/ 어제의 敵(적)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敵(적)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敵(적)은 없고
(김수영, '敵(적)',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5)

김수영(1921~1968)의 시 '敵(적)'은 여름날, 더위에 지쳐 눈이 푹 꺼지는 경험을 한 사람에게 실감나는 시이다. 이 시의 '더위'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양심을 지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시인의 적을 1연에서 '해면같다', '문어발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어 갈수록 '더위'(더운 공기)는 사람의 양심과 독기를 흡반으로 빨아들이는 정체불명의 존재로 암시되고 있다. 더위를 누가 볼 수 있으랴. 마찬가지로 사람의 양심을 없애는 사회 환경을 누가 볼 수 있으랴.

해면이 ------- 더위가 ------ 문어가 --- 어지러운 사회가 --- 나의 적
물기를 ------- 내 기운을 ---- 먹이를 ------ 내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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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아들인다

즉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더운 날씨가 내 기운을 빨아들이고 문어가 먹이를 빨아들이고 어지러운 사회가 내 양심을 빨아들이는 이들은 '나의 적'임을 암시적으로 알려 준다. 그런데 더위에 붉게 익은 시인 자신의 얼굴이 문어를 닮은 것처럼 시인도 살면서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와 시대적 양심의 '적'은 시인 자신을 비판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2연에서 시인의 집 명패를 문어의 흡반으로 비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적은 더운 공기처럼 내 안에도 들어오고 나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 정체를 볼 수 없다. 더운 공기를 호흡하듯 양심의 적을 호흡하고 살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나도 사회의 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사회 정의 내지 양심의 적은 누구라고 규정할 수 없다. 양심과 양심의 적은 시금치밭의 흑나비와 주홍나비처럼 과거와 미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숨바꼭질을 한다. 더위가 물기를 갈취하듯 사는 환경이 열악해지면 누구나 흡반 달린 문어로 바뀌어 양심을 쉽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주변에서 김해동과 정병일의 사는 모습을 보면 일견 실명인듯 보이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적'은 한마디로 매도할 수 없는 나의 친구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즉 적'은 내 안에도 있고(2연) 내 친구의 사는 방식(3연)에도 있고 사회 전체(4연)에도 퍼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치안 질서를 지키기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찰(순사)이나 땅투기로 전세자들을 울리는 땅주인의 양심 없는 상거래, 법규를 어기고 과속을 하는 운전기사의 비양심에 이르기까지 사회 정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시민들의 행동이 '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시는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는 사회 윤리를 가져야 하는데도 생존 법칙만을 따라서 반사회적, 반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문어발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사에서부터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사회 정의를 생각하는 시인의 근대 시민 의식과 비교해서 자신의 이익에 급급해 양심 없이 살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고 더위 먹은 채 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