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감상]

서정주의 시 '기도1'(祈禱 壹)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저는 시방 꼭 텡인 항아리같기도 하고, 또 텡 인 들녁같기도 하옵니다. 하눌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狂風)을 제 안에 두시던지, 날르는 몇 마리의 나 를 두시던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같이 하시던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祈禱壹(기도 일), 『서정주시선], 1955]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시 "기도 1"(祈禱 壹)은 일찍이 그 글이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 담겨 널리 알려졌는데 "하늘이어......하소서" 형식에서 기도의 틀이 보인다. 이 시에서는 '텡' 빈 '들녘'과 '항아리'가 서로 견주어지고 이들의 비유 관계는 다시 시적 화자 자신에게 모아진다. 여기서 '텡' 빈 들녘은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이고 이들 논은 '수전(水田=무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을걷이가 끝나 물만 남고 텅 빈 들녘과 창작 후의 지치고 텅 빈 작가와 텅 빈 항아리의 접점이 생긴 셈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들녘이나 항아리나 그리고 시적 화자까지도 물과 함께 무엇인가를 기르는 터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들녘은 벼, 보리 같은 곡식을 기르고, 물 담은 항아리는 꽃을 피운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에서 무엇인가를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시인이라는 점에서 모성적인 생산성이 인정된다.

들녘
항아리
시적 화자
생산자
l l l l
곡식

(시 창작)
생산품

이 시에서 들녘과 항아리의 공통점은 "안에 물을 담아/ 식물을 키우고/ 나비가 날아다녀/ (열매를 맺는다)"로 나타난다. 그런데 항아리는 일시적으로 꽃을 기르는 그릇이라 모진 광풍이 일고 나비가 날아다니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들녘의 상황에 어울리는 '모진 광풍'과 '나비'의 이미지는 오히려 들녘과 시적 화자를 가깝게 한다. 봄의 들녘에 씨를 뿌려 여름의 들녘에서 모진 광풍이 불고 비가 풍성하게 오면 곡식이 부쩍 자라게 되고, 나비가 날아다니며 수정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가을 들녘이 되면 농부가 낫을 들고 곡식을 베어 창고에 쌓는다. 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그의 창작에 영양소가 되는 '모진 광풍'과 같은 체험이 있어야 되고 그 체험을 열매 맺게 하는 상상력이 나비와 같이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비로소 작품이 태어난다.

    들녘 ----------------------------------------------------------------- 시적 화자
x 모진 광풍이 분다 ------------------- x 영양소(물) ----------------------- x 현실 체험
x 나비가 날아다닌다 ------------------ x 매개자 -------------------------- x 상상력
x 열매가 익는다 ---------------------- x 결실 ---------------------------- x 창작
x 곡식을 벤다 ------------------------ x 분리 독립  ----------------------- x 창작물

이렇게 들녘과 시적 화자 간에는 어머니 대지의 능력이 주어졌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탯줄을 끊어야 그 아이가 살듯이 곡식은 들녘을 떠났고 창작물은 시인의 손을 떠났다. 이제 텅 빈 들녘과 같은 시인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던 빈 항아리로 남아 있다. 텅빈 들녘이 쓸쓸한 것처럼 꽃이 없는 항아리가 을씨년스럽고 작품을 끝낸 시인의 상태도 지치고 허전하고 아무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힘들게 일을 끝낸 뒤의 공허함이 시인에게 텅 빈 들녘과 텅 빈 항아리를 연상케 하였고 이제 그는 다시 하늘에게 기도하며 하늘이 다시 그에게 모진 광풍을 내려 주어 풍요로운 소재를 지닌 비가 자신 속에 가득 찰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소재에 열매 맺을 나비와 같은 상상력의 힘을 부여해 주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항아리와 시인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빈 항아리 -------------------------------------------------------- 피곤하고 지친 시인
x 꽃을 피웠다 --------------------------------------------------- x 창작물을 만들었다
x 담겼던 꽃과 향기를 기억한다 ------------------------------------- x 자신이 만든 작품을 그리워한다
x 얼룩지고 혼탁한 물이 담겨 있다 ----------------------------------- x 창작 뒤의 멍하고 지친 상태다
x 새로운 꽃과 향기를 기대한다 -------------------------------------- x 새로운 작품을 기대한다

이 시에서는 추수를 끝낸 어머니 대지와 같이 작품을 창작한 뒤의 지치고 멍청하고 다소 행복한 시언의 상태가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