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한용운의 시 '비밀'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비밀(秘密)임닛가, 秘密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秘密이 잇것슴닛가.
나는 당신에게 대하야 秘密을 지키랴고 하얏슴니다마는 秘密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얏슴니다.

나의 秘密은 눈물을 것처서 당신의 시각(視覺)으로 드러갓슴니다.
나의 秘密은 한숨을 것처서 당신의 청각(聽覺)으로 드러갓슴니다.
나의 秘密은 니는 가슴을 것쳐서 당신의 촉각(觸覺)으로 드러갓슴니다.
그 밧긔 秘密은 한 각 붉은 마음이 되야서 당신의 으로 드러갓슴니다.
그러고 마즈막 秘密은 하나 잇슴니다. 秘密은 소리업는 매아리와 가타서 표현(表現)할 수가 업슴니다.
(「秘密」, 『님의 침묵』)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시 「秘密」에 나타나는 화자는 조선 시대의 여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성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점이다. 시적 화자는 제1연에서 계속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내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라고 발뺌하면서도 어떤 비밀이 있음을 함축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또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란 발언도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화자도 사람인 이상 자신이 간직한 사랑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연에 오면 이런 팽팽한 시치미 떼기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감정은 눈물로 흘러내리고, 한숨으로 흘러넘친다. 폭발할 것 같은 가슴의 진동은 저절로 떨림으로 표현된다. 감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외의 비밀은 (그만큼 화자의 사랑이 간절하다면) 상대의 무의식을 움직여서 상대의 꿈속으로까지 흘러 들어간다. 이렇듯 시적 화자의 사랑은 말 못할 비밀이기 때문에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흘러넘쳐 꿈속으로까지 파고드는 역설적이고 지독한 양상을 띤다.
    제3연에서는 표출되지 않은 화자의 마지막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다고 한다. 이 말 자체는 모순 어법(oxymoron)이다. 모순 어법을 통해서 소리 없는 것이 소리 없는 것이 아닐 수 있는 상태, 메아리가 울리지 않아도 메아리칠 수 있는 그런 높은 경지의 사랑이 암시된다. 이렇듯 사랑의 비밀은 대상 간의 거리로 나타나고 대립 행위를 통해 계속 해소되고 있다.

공개적이다 / 비밀이다
거리, 간격이 없다 / 거리, 간격이 있다
말로 알아듣는다 / 시각, 청각, 촉각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현실로 표현하다 / 꿈으로 들어가다
메아리치다 / 소리 없는 메아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차적인 '거리 두기'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서는 단계 또한 다양하여 상대방에게 감각적으로 전달되었다고 해서 그에게 다가섰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의 꿈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역시 다가섰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는 무궁무진하여 감각적 표현으로 전달되었다고 해서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꿈으로 전달되었다고 해서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안 나지만 메아리쳐서 울려야 비로소 당신에게 다가서는데 그것은 화자에게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즉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1차적 거리 - 비밀이었으나 시각, 청각, 촉각적 표현으로 해소함
2차적 거리 - 그 밖의 비밀, 꿈으로 들어가 해소함
3차적 거리 - 마지막 비밀, 소리 없는 메아리가 되어야 해소됨, 유보 사항임

'메아리의 비유'에서 한쪽 산에서 울려 퍼져 가던 사랑의 소리가 상대방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부딪쳐 되울려 와야 하는데 화자의 사랑의 비밀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메아리 소리가 울리지 않아도 메아리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적 화자의 마지막 비밀은 단순한 남녀 간의 통속적인 단계를 벗어난 구도적 사랑으로만이 해소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사랑하는 대상과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음도 이 시는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