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특집]

우리말 의학 용어의 순화

황건(黃健) /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실무위원장

환자는 의사 앞에만 가면 무기력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의사가 진찰 결과에 대한 설명은 해 주지 않고 옆에 있는 전공의에게 "Inguinal region에 mass가 있는데 hernia 같지는 않으니 biopsy를 준비하고 만약 malignancy로 판명되면 OP schedule을 잡지!"라고 말했다면 환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이 더욱 불안할 것이다. 환자가 "뭐가 잘못 되었는가요? 선생님."하고 그 전공의에게 물었을 때, "서혜부에 종괴가 있는데 탈장 같지는 않고 생검을 해서 만약 나쁜 병이면 수술 스케줄을 잡으라고 했습니다"라고 답을 했다면 환자는 더욱 기겁을 할 것이다.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앞부분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뒷부분의 끔찍스러운 말만 머리에 남게 될 것이다.
    의사끼리는 필요할 경우에 위와 같이 영어가 섞인 말로 주고받아도 되겠지만,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는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설명해 주는 것이 참다운 의사이다. "사타구니에 샅굴(inguinal canal)이 있는데 그 근처에 덩어리가 잡힙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탈장 같지는 않고 무슨 조직의 덩어리인 것 같아 조직을 조금만 떼서 검사를 해 보고, 만약 나쁜 조직이면 수술로 떼어 내겠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하면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의사가 TV에 나와서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 경우에도 의사는 의대 학생이 아닌 일반 사람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한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부에는 많은 건이 있고 근육이 수축 이완을 할 때마다 이것이 지골을 당겨 굴신을 하게 해 줍니다(손에는 많은 힘줄이 있고 근육이 줄었다 늘어났다 할 때마다 이 힘줄이 손가락뼈를 굽혔다 폈다 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언어는 문화가 창출한 가장 큰 열매이자 그 문화를 퍼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 이름을 바꾸게 하고 우리말을 못 쓰게 하는 한편 일본말만을 쓰도록 강요했던 것은, 바로 일본 문화를 보급하여 한국의 문화를 근본도 없이 만들려고 했던 술책이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온 우리는 이제 영어 문화권의 편의성에 젖어 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 굴레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자를 좋아하는 일본 해부학계에서조차 요즈음에는 신체아가야 되는가? 게다가 일본 사람도 불편하여 30년도 더 전에 버린 용어를 지금까지 우리가 고수해 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말 용어는 사장하고 외국어 용어만을 쓰게 되면, 의학에 관한 한 앞으로는 한국적인 것은 없고 외국의 것만이 활개를 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외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학생들은 물론 가르치는 선 각 부위 이름을 순 일본말인 '가타가나'로 바꾸어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하고 있는가? 언제까지 남의 뒤만 쫓생도 나라 사랑을 말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풍속, 관습, 생각에 뿌리를 둔 우리말로 의학 용어를 써 나가는데 뜻을 모아야 한다.
    2001년 초 대한의사협회에서는 해부학 용어를 비롯한 새로 바뀐 많은 우리말 용어를 수록한 의학용어집(넷째판)을 펴냈다. '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과 '대한의학회'에서는 2004년도부터 의사 국가시험과 전문의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에 의학용어집(넷째판)의 용어를 사용할 것을 공표한 바 있다. 이 용어집의 출판, 보급과 더불어 우리말로 순화한 의학 용어를 즐겨 사용할 수 있도록 실천해 나가는 의지를 보여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