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김영랑의 시어 '제운 밤'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어버린다
못견듸게 묵어운 어느 별이 떠러지는가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떳다 가란젓다
제운 밤 이 한 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히부얀 조히 등불 수집은 거름거리
샘물 졍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한 해라 기리운 졍을 몯고싸어 힌 그릇에
그대는 이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제야」, 『시문학』, 1930)

연말이 다가오는데 김영랑(1903~1950)의 시 "제야(除夜)"를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이 시에는 우리가 민속에서 섣달 그믐날 밤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잘 나타난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 이 시에서는 촛불의 녹아내림이나 별의 추락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제운 밤'이란 말 자체도 상당히 모호한데 '제우다'라는 말은 사전에 '겹다'의 제주 방언으로 나타난다. '겹다'란 "1) 정도나 양이 지나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 2) 때가 지나거나 기울어서 늦다."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제1연에서는 촛불이 흘러내리는 촛농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떨어지고 있고, 수명이 다한 별도 늙어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떨어지는 이미지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 속에 켜져 있는 촛불은 시간이 흘러감을 알려 주는 이미지만은 아니다. 우리의 민속에 섣달 그믐날 밤에는 방마다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다. 이날 밤에 잠을 잔 사람은 다음날 눈썹이 하얗게 세어 버린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면서 밤을 새우느라 애쓰곤 했다. 그래도 졸려 잠이 들면 아침에 눈썹이 하얘진 것을 알고 겁나서 우는데 사실은 잠자던 아이 눈썹에 누군가가 황칠을 한 것이다. 이렇게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인 듯한데 이런 풍습에는 한 해를 보내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와 결심이 엿보인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시간의 흐름이, 제1연에서는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리는 이미지와 하늘의 별이 제 무게를 못 견디어 떨어지는 이미지로, 제2연에서는 수심의 이미지로, 제3연에서는 종이 등불로 나타난다. '수심'은 모호한 중의적 뜻을 나타내는데 다시 말하자면, '수심(水心, 수면(水面)의 중심. 강이나 호수 따위의 한가운데.)'이면서 '수심(愁心, 매우 근심함)'이다. 원래의 뜻은 '수심(愁心)'이겠지만 시인은 "떴다 가라앉았다"라는 서술어를 쓰면서 수심(水心)인 것처럼 표현한다. 사람들이 한 해에 못다 이룬 꿈이라든가 실수, 청산하지 못한 빚, 망쳐 버린 꿈 등 한 해를 기쁘고 만족스럽게 보내기에는 부족한 근심거리가 제2연에서 가슴속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듯 한다는 것이다. 그런 복잡한 심사로 밤을 밝히려니 그 밤이 견디기에 모질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제3, 4연에서는 이런 가족과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집안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시인의) 아낙이 종이 등불을 들고 수줍은 걸음걸이로 샘물을 길어 와 흰 (사기) 그릇에 물을 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살며시 등장한다. 여기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몯고싸어 흰 그릇에"란 구절에서 '기린다'는 말은 "그리워하다, 칭송하다, 찬양하다"란 뜻이고 '몯다'란 "'모이다'의 옛말"로 풀이된다. 제1, 2연에서 한 해의 애증(愛憎) 어린 사건들로 얽힌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를 제3, 4연에서는 오히려 '기리운 정'으로 여겨 그것들을 모으고 쌓아 물 그릇에 담아 놓는 행위로 바뀐다. 수줍게 물을 길어다 흰 그릇에 담아 놓고 비는 여인은 앞 연의 녹아 버리고, 떨어지고, 잠기는 한 해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하강의 패배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맑은 샘물을 길어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재생과 부활의 이미지로 바꾸어 버린다.
    이 시에 나타나는 여인은 바로 조선의 전통적인 어머니이자 아내들로서 집안에서는 가신(家神)의 구실을 하는 존재인데, 이들을 통해 한 해의 마지막 밤은 가는 해의 불신과 허무를 안고 가기도 하지만 오는 해의 희망을 가져오는 양면적인 역할을 하는 시간이 된다. 이런 제야의 시간처럼 집안을 지키는 전통적인 어머니는 어른과 아이를 이어 주는 매개 역할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제의 역할을 해 왔음을 이 시는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