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김영량 시어 '재앙스럽소'

김옥순(金玉順) / 한겨례 교열부장

뉘 눈결에 쏘이엿소
왼통 수집어진 저 하날빛
담 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밧게 봄은 벌서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두리 단두리로다
뷘 골ᄉ작도 붓그러워
홀란스런 노래로 힌 구름 피여 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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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1903~1950)의 '뉘 눈결에 쏘이엿소'로 시작하는 이 시는 자연물 전체가 봄의 난장적(亂場的) 분위기로 물들어 있음을 충격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결에 쏘여 수줍어하는 비유 대상이 바로 하늘빛이기 때문이다. 벌에게 침으로 살을 찔려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누군가의 구애(求愛)의 눈결에 쏘여서 수줍어진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하늘빛인 것이다. 만물을 덮고 있는 하늘빛이 온통 수줍어져 있다면 그 아래 있는 다른 지상의 봄기운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담 안에는 복숭아꽃이 붉은데, 그것은 흔히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도화녀(桃花女)의 아름다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색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제1연에서는 하늘빛이 지상의 담 안에 핀 복숭아꽃의 붉은색에 전염되어 제한된 공간에서의 피할 수 없는 난장의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제2연에서는 꾀꼬리와 구름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꾀꼬리들은 온 세상이 자기네 둘인 것처럼 자연의 본능에 그대로 따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빈 골짜기가 자신들을 바라볼까 부끄러워 노래를 불러 흰 구름을 피워 올린 것이라고 시인은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제1연은 담 안의 하늘이 지상의 복숭아꽃에 쏘여서(?)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데 반해 제2연은 담 밖의 골짜기에서 흰 구름이 꾀꼬리의 난장을 감춰 주는 연막 작용으로 피어오름을 표현한다. 정말 담 안과 골짜기 전체가 봄 난장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단어는 '재앙스럽소'이다. 김재홍의 "시어 사전"에는 이 시를 인용하면서 이 단어의 뜻을 "한창 무르익다, 절기가 따뜻하다"로 풀이하고 있고 동시에 다른 인용을 보이는 같은 표제어에서는 "'말썽'의 다른 표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일반적인 '재앙'의 뜻은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 시의 '재앙스럽소'가 구태여 "한창 무르익다, 절기가 따뜻하다"의 봄기운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기보다 오히려 본능적 충동에 충실한 봄의 난장적 분위기를 반어적으로 나타내는 "'말썽'의 다른 표현" 쪽이 어울릴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난장'이란 조선 시대 축제 때 벌인 하회 별신굿 탈놀이처럼 기존 질서가 뒤집힌 상태로 상전인 양반이 바보가 되고 종이 주인이 되며 추함이 미모를 누르고 질서가 무질서에 그 자리를 내주는 축제의 시기를 말하므로 글자 그대로 말썽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는 자연물 중 가장 높은 담 안의 하늘도 지상의 복숭아꽃에 휘둘려 붉게 물드는 상황으로 표현된 것이다. 거기다 고상하고 깨끗해야 할 흰 구름조차 꾀꼬리의 사랑을 위한 방패 노릇을 하고 있음에랴.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의 봄도 꿈도 기존 질서를 벗어난 말썽스러운 난장의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석하는 쪽이 오히려 어울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