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글 쓰기

요건 충족 없이 쓰이는 말들

김희진(金希珍) / 국립국어연구원

말은 그 나름대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 사용할 것을 사용자에게 요구한다. 단어든 어절이든 문장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요건을 무시한 채 말하여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듯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몇몇 예를 단어에서 찾아본다.

(1) 저명한 아시아계 정치인으로 외무부 유럽 담당 국무상을 역임한 키스 바즈 의원. <ᄆ신문, 9. 17.>
(2) 7월 말 현재 국내 휘발유 가격은 ℓ당 1270원으로 미국의 450원에 비해 월등히 비쌌다. <ᄃ신문, 9. 16.>
(3-1) 현대·기아 차를 필두로 국내 자동차 업계는 내년 초부터 텔레매틱스 시스템을 옵션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ᄀ신문, 9. 16.>
(3-2)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유신 반대 데모를 필두로 해서 촉발된 학생 시위는 12월 초까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ᄒ 신문, 9. 8.>
(4) 종기 씨 등 5명의 남쪽 동생과 해후한 임종섭 씨(79)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목포상고 3년 선배이며, 문화 예술계 책임자로 일해 온 것으로 전해졌 다. <ᄀ신문, 9. 14.>
(5) 지금까지 집계된 수치만 따져도 두고두고 끔찍했던 경험으로 회자되는 1959년의 '사라'나 1987년의 '셀마'의 피해 규모를 훌쩍 넘어 섰을 정도다. <ᄒ 신문, 9. 4.>

(1) '역임(歷任)하다'는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내다'로, "박 내정자는 민정당-민자당 도지부 여성부장, 한나라당 도지부 사무부 처장과 5대 도의원(비례 대표)을 역임했다.<세계일보, 9. 17.>"처럼 직책명을 둘 이상 나열할 때 쓸 수 있다. 직책명 하나만을 제시할 때에는 '역임하다'가 아닌 '지내다'를 쓴다.
    (2) '월등(越等)하다'는 '다른 것과 견주어서 수준이나 실력이 훨씬 낫고 뛰어나다'로, "고철 부두에 설치할 예정인 방진 시설은 현재 인천항 8부두 방진 시설보다 규모와 성능이 월등하므로 공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중앙일보, 9. 17.>"처럼 비교 내용이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일에 쓴다. 다른 것과 비교하여 수치가 아무리 높게 나와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에는 '월등한'이 아닌 '훨씬'을 쓴다.
    (3) '필두(筆頭)'는 '붓의 끝'으로, '나열하여 적거나 말할 때, 맨 처음에 오는 사람이나 단체'를 이른다. "민주당에 맞서 한나라당도 임인배 수석 부총무를 필두로 '박 의장 구출조' 의원 28명을 의장 공관에 투입했다.<국민일보, 9. 1.>"가 그 예다. (3)에서 보인 자동차 같은 무정물 또는 행위는 필두가 되지 못하므로 (3-1)의 '필두로'는 '비롯하여'로, (3-2)의 '유신 반대 데모를 필두로 해서'는 '유신 반대 데모를 위시한 일련의 데모로'로 고쳐야 자연스럽다.
    (4) '해후(邂逅)하다'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나다'를 이른다. 즉, 우연성이 개재되지 아니하면 '해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상봉한' 것이고 '만난' 것이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제 또래의 젊은이들은 영화 속 남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뜻밖의 해후에 동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국민일보, 9. 4.>"의 예처럼 써야 한다.
    (5) '회자(膾炙)'는 본래 '회와 구운 고기'라는 뜻으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림'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 입에 아무리 자주 오르내려도 그 내용이 상찬(賞讚)하는 것이 아니면 '회자되지' 않는다. "'스리마드 바가바탐'은 인도 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로 일반 대중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동아일보, 8. 24.>"는 훌륭한 예가 된다.
    일정한 요건―예컨대 '역임하다'는 직책명이 둘 이상일 것, '월등하다'와 '회자되다'는 비교 대상이나 말하는 내용이 가치 있고 바람직할 것, '필두'는 앞장선 것이 사람이나 단체일 것, '해후하다'는 그 만남에 '우연성'이 있을 것 등―을 충족하는 말을 사용하자. 본지(本旨)를 제대로 전달하고 그 특유한 말맛도 살리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