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산업 혁명에 비길 한글의 창제

남기심(南基心) / 국립국어연구원장

다시 한글날이 돌아왔다. 한글 창제가 가지는 의미, 우리가 한글이라는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더 살펴볼 기회가 된 것이다.
    한글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우수한 문자로서의 한글을 다투어 찬양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한글의 중요성은 그 우수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민족은 어찌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한자를 향찰처럼 쓰고 있을까, 아니면 로마자를 빌려서 쓰고 있을까? 한글이 없이 우리가 오늘과 같은 산업 사회, 정보 사회를 이루어 이른바 선진국 대열 문턱에 설 수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한글의 창제는 서양의 산업 혁명에 비길 수 있는 큰 사건이다. 그런데 한글 창제 이후에 한글 홀대가 너무 심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일이거니와 지금도 한글날은 그 흔한 공휴일의 지위도 얻지 못하고 그저 간단한 기념행사만 치르고 만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활자를 만들어 쓴 민족이면서 그 활자 인쇄 기술을 크게 활용하지 못했고,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이런 편리한 문자를 만족스럽게 이용하지 못했다. 남보다 먼저 발명한 활자의 기술과 한글을 잘 활용하였더라면 우리의 문화가 진작에 한발 앞섰을 텐데 조선조 몇백 년 동안 한글 사용을 천시하기만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한글 같은 훌륭한 문자를 가진 덕택에 정보 산업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 앞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제 글을 어법에 맞게, 그리고 규범에 맞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한글 홀시가 계속되는 것같이만 생각된다.
    한글날이 공휴일의 지위를 박탈당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 같은 번영을 이룬 것은 한글로 인해 문맹이 없고, 따라서 높은 학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민족의 번영은 한글 창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한글날이 공휴일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보다도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일이다. 생각하면 한글날은 광복절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잃었던 삼십오 년은 오천 년이라는 긴 역사로 보면 그저 잠시의 일이고 한때의 불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랑할 일도 아니다. 우리의 민족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은 삼일 운동으로 드러났고, 삼일절로 그 자랑스러움을 되새긴다. 이렇게 보면 팔일오 광복절보다는 오히려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어 더 큰 경축 행사가 있어야 함 직하다.
    한글은 물론 우리말을 적기 위해 만든 글자이므로 원칙적으로 남의 말을 적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글자 모양이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또 한글의 자모를 모두 조합하면 수천 개의 음절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문자가 없는 언어가 가져다 써도 불편이 없을 글자다. 대외적으로 크게 선전해 봄 직하다. 한글날을 맞아 다시 한번 긍지를 가져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