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김영랑의 시어 '장광에 골불은 감잎'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5>

김영랑의 시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빼면 시를 읽는 맛이 줄어들 정도로 사투리가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이 시에 쓰인 전라도 방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매' 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인데 요즘은 '어머'라고 하거나 젊은 사람들은 서양식으로 '와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단풍 들것네'에서 '-것-'은 추정으로만 쓰이는 '-겠-'의 전남 방언이다. '장광'은 '장(醬)을 놓는 광'이란 뜻으로 '장독대'를 가리킨다. '기둘니리'는 '기다리리'의 전남 방언인데 '기다림'의 의미를 한층 더 운치 있게 느껴지게 한다.
    '골불은'은 "'붉다'를 강조한 전라 방언으로 '짓붉은'의 뜻"(김재홍, "시어 사전", 고대출판부, 1997년)이라고도 하고, "'골붉은'으로 '고루 붉은'의 뜻"(허형만, "영랑 김윤식 연구", 국학자료원 1996년)이라고도 하고, "과일이나 고추가 반쯤 익어 간 상태를 나타내는 전라도 방언"(이승훈, '대표시 20편 이렇게 읽는다', "문학사상", 1986년 10월호)이라고도 하고, "'조금 붉은' 아니면 '반만 붉은' 정도의 뜻으로 보든지, 아니면 살짝 붉은"(오홍일, 방언학자)이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이 시에는 남성인 시적 화자의 장난기 어린 태도와 누이의 사투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누이의 사투리를 시에 직접 인용함으로써 사투리를 시어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누이의 말을 자꾸 흉내 냄으로써 누이를 놀리는 어조(tone)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우리가 누구를 놀리려 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반복해서 흉내 내곤 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에서도 그런 미묘한 뉘앙스가 나타난다.
    '오-매 단풍 들것네'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발화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말 그대로 온통 단풍으로 물들 가을이 곧 올 것을 감탄 섞어 추정한 말로 보이지만, 세 번째로 쓰인 '오-매 단풍 들것네'에서는 시적 화자가 누이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누이의 마음에도 이제 곧 단풍 드는 청춘의 어떤 시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뜻으로 놀리듯이 말하고 있다. 즉 앞의 두 문장과 세 번째의 문장은 각각 가리키는 대상이 바뀌어서 앞에서는 감잎으로 대표되는 나뭇잎을, 뒤에서는 누이의 마음을 감탄과 놀림으로 가리키고 있다.
    구체적으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가 이어지면서 여성인 누이와 남성인 나와의 사이에 단풍이 들듯 어떤 화학적 반응이 나타날 것을 장난기 섞어 예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지칭하는 '누이'란 말은 모호한 의미 표현으로 점잖은 한국의 남성들이 이성의 여성을 가리킬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를 보면 이 시에 나타난 누이는 아직 어린 소녀로서 장독대에 무엇인가를 가지러(아마 된장이나 고추장) 갔다가 붉은 감잎이 첫 단풍으로 바람결에 날아오는 것을 보고 가을의 징표를 예감하는 감탄사를 발하였을 것이다. 이어서 연상되는 누이의 생각은 가을 명절인 추석에 차릴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이 기다려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풍년이 들어야 할 텐데 잦은 바람 때문에 농사에 손실을 입을까 봐 걱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만큼 시적 화자가 보는 누이는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었고 다분히 물질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시인 영랑이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일 년 만에 상처하였다는 전기적 사실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관심은 그런 물질적으로 풍요한 명절에 품는 어떤 현실적 기대가 아니라 가을 단풍이 최초로 물들듯 누이의 어린 마음에 어떤 이성의 모습이 처음 물들 것인가 하는 점에 초점이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 여성이 무심한 소녀의 마음에서 처녀기로 바뀔 때 큐피드의 화살이 누구를 향할지 그 미묘한 심리적 변화를 절묘하게 감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