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를 찾아서

'25시(時)'와 '쿠오바디스'

이준석(李浚碩) / 국립국어연구원

우리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말로 '25시(時)'가 있다. '사건 25시', '추적 25시', '패트롤 25시', '특파원 25시', '긴급 출동 연예가 25시', '신생아 병동 25시' 등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목들이고, '엘지(LG) 25시', '25시 만남의 광장 뷔페식당', '25시 주유소' 등은 '25시'가 상호에 쓰인 예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의 액션 영화 제목이 '암흑가의 25시'였고, 한때 인기 있었던 코미디 프로가 '네로 25시'였다.
    '25시'만큼 생성된 시점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면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고사 성어도 없을 것이다. '25시'는 루마니아의 소설가 게오르기우(Gheorghiu, C. V.)가 1949년에 발표한 소설 제목에서 유래한다. 그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선량한 농부 모리츠를 통해 나치스와 볼셰비키의 학정과 현대의 부조리를 고발한 것으로서 작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25시'는 '하루 스물네 시간 다음의 시간'이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 버리고 늦어져서 느끼는 불안과 절망감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을 상징하는 '25시'가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24시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매우 바쁘고 분주한 삶'의 의미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안전 인증 업체에서 운영하는 점검 반 이름이 '25시 점검 팀'이고, 스타의 바쁜 일상을 다룬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명칭이 '스타 25시'이다.
    유하의 시 '참치 죽이 있는 엘지(LG) 25시의 풍경'에서처럼 우리들은 일상의 끄트머리에서 상상의 편의점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25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 '25시'에서 작가 게오르기우가 순박한 농부 모리츠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절망과 불안감이 과거 지향적인 것이었다면, 고사 성어 '25시'에는 일상에서 한 시간이 더 필요할 정도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현대적 삶의 미래 지향적 속성이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25시'와 함께 주변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이 '쿠오바디스' 또는 '쿼바디스'이다. 월드컵 열기의 막바지에서 '4강 신화'를 창조한 히딩크의 거취에 국민적 관심이 모아질 때 모 스포츠 신문의 제목이 '쿼바디스 히딩크'였고, 얼마 전에 출간된 모 정치인의 저서 제목이 '쿼바디스 코리아'였다. 또 미 연방 법원의 독점 금지법 위반 판결로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업체의 운명이 존폐의 기로에 몰렸을 때 국내 일간지에서 뽑은 제목이 '쿼바디스 마이크로소프트'였다.
    '쿠오바디스' 또는 '쿼바디스'로 표기되는 이 고사 성어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쿠오바디스(Quo vadis)'가 맞다. 라틴 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으로서 "요한복음" 제13장 제36절이 출전이다. 성서에 의하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내리는 예수에게 베드로는 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평소와 다른 예수의 모습에서 이제 주께서 먼 길을 떠나시나 보다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던지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도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담담히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의 예문에서 이 물음은 마치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에게 비장하게 묻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1) 설 땅 잃은 우리 선수들은 '쿼바디스 도미노'(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칠 수밖에 없다. <일간스포츠, 2000. 8. 4.>
(2) 오르락내리락 어지럽게 움직이는 증시에서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절규하는 투자자들에게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한국일보/엔터테인먼트, 2001. 12. 3.>
(3) [갈길을 가르쳐 주소서] 여자 실업 농구 관계자들이 '쿠오바디스'를 되풀이하고 있다. '여자 농구 남자 프로화로 대잔치 폐지...팀 해체설 분분' <조선일보/스포츠, 1997. 1. 7.>

왜 평범한 질문이 이렇게 절박하고 비장한 분위기에서 쓰이는 것일까? 이는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Sienkiewicz, H.)가 1896년에 발표하여 190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과, 이를 영화화한 "쿼바디스" 때문인 것 같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 소설과 영화에서 네로가 기독교도들에게 가한 박해는 절박하고 비장하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용례들 가운데에는 성서의 원래 의미대로 단순히 방향을 묻는 의미로 사용되는 예문들을 발견할 수 있다.

(4) 주제는 '쿠오바디스, 그래프 이론'이었다. 수학상의 그래프 이론이 어느 분야까지 영향을 미치고,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방향을 수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이다. <조선일보/사회, 1999. 9. 12.>
(5) '쿠오바디스(Quo vadis) 빅 3'(3강은 어디로 가는가) 신임 이상철 정보 통신부 장관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국일보/주간 IT 기류, 2002. 7. 28.>

모 일간지의 칼럼 제목이 '한나라의 쿠오바디스', '쿼바디스 자민련'이었는데, 이들 또한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쿼바디스 히딩크'가 이 고사 성어의 원래 의미에 가장 가깝게 사용된 용례가 아닌가 싶다.

국어 속의 고사 성어들 가운데 '25시'나 '쿠오바디스'는 현대에 수입된 서양 문화에 유래된 것들로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말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