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어원

'양치질'

홍윤표(洪允杓) / 연세대학교

치과 병원에 처음 갔을 때, '양치하다'와 '양치질하다'가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희한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양치하다'는 '물로 입 안을 가시는 일'을, '양치질하다'는 '칫솔로 이를 닦는 일', 즉 '칫솔질'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다. '양치질'은 '양치'에 접미사 '-질'이 붙은 것인데, 이렇게 뜻이 달라진 이유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양치'가 한자어일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양치'를 '양치(養齒)'나 '양치(良齒)'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양치질'은 '양지질'의 변화형이다. 그리고 '양치질'은 엉뚱하게도 '양지(楊枝, 버드나무 가지)'에 접미사 '-질'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양지질'은 '양지', 즉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청소하는 행위인 것이다. 오늘날 '이쑤시개'를 쓰듯이,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잘라 사용했던 것이 옛날에 '이'를 청소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양지질'의 역사는 무척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문헌인 "계림유사"(1103)에 '양지'가 보이는데, 여기에 '齒刷曰養支'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지'는 원래 오늘날의 '이쑤시개'나 '칫솔'과 같은 도구의 이름으로 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쇄(齒刷)'는 '이쑤시개'나 '칫솔'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5세기 문헌에는 이 '양지'가 '물로 입안을 가시는 일'로 나타난다.

더운 믈로 양지고 <"구급간이방"(1489)에서>
박하 달힌 믈로 양지고  십고 <"언해태산집요"(1608)에서>

이 '양지'가 '양치'로 바뀐 것은 17세기 말이다. 문헌들을 검색해 본 결과, '양지'의 형태를 마지막으로 보이는 문헌은 "박통사언해"(1677), '양치'로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역어유해"(1690)로 보인다.

져기 믈 가져오라 내 양지질 쟈 <"박통사언해"(1677)에서>
양치믈다(漱口) <"역어유해"(1690) 권 상에서>

이때에도 '양치질'은 '칫솔질'과 같은 뜻이 아니라 단지 '입 안을 헹구는 일'을 뜻하였다. 그래서 '양지다'는 '양슈다'(養漱하다)로, 그리고 '양지질'은 '양짓믈'이나 '양슈믈'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 이것은 한자 '수(漱)' 때문에 생겨난 단어이다.

가모 등이 모다 의복을 더 닙고 양슈며 챠롤 마시고 <"홍루몽"(1884?)에서>
양짓믈도 아니야 <"손방"(1760?)에서>
밥을 먹고 양슈믈을 맛 <"홍루몽"(1884?)에서>

이렇게 '양지질'에서 '양지(楊枝)'에 대한 어원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이'의 한자인 '齒'에 연결해 '양치'로 해석하게 되어 '양치질'이 등장하게 된다.

니러나 衣裳을 닙고 셰슈 양치질을 임의 다 매 <"여사서언해"(1736)에서>
양치믈다〔漱口〕 <"몽어유해"(1768) 권 상에서>
양치질〔漱口〕 <"방언유석"(1778)에서>
셰슈믈 가져오고 양치믈 가져오라 <"첩해몽어"(1790)에서>
양치다(養齒) <"한불자전"(1880)에서>
양치(養齒)<"국한회어"(1895)에서>
양치질다〔漱〕 <"광재물보"(?)에서>

이미 1880년에 간행된 "한불자전"에 '양치다'를 '養齒'로 적고 있고 역시 1895년에 간행된 "국한회어"에도 '양치'를 '養齒'로 적고 있다. 이어서 1938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조선말사전"에서도 '양치'를 '養齒'로 적고 있어서, '양지'가 '養齒'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그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양치'를 '이를 닦고 입 안을 가심'이란 풀이를 해 놓고, 또 어원을 '楊枝'로 적고서도 "한자를 빌려 '養齒'로 적기도 한다."라는 부가 설명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그런데 문세영의 "조선말사전"(1938)에는 '양지(楊枝)'도 표제항으로 올라 있는데 그 뜻이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 치목(齒木)과 같음'이란 풀이를 하고 있어서 '양치질'과는 그 뜻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사전"에 보이는 '양지'의 내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사전에서 '양지'를 '이쑤시개와 동일함'이라고 풀이한 것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이 '楊枝'는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음인 '요지'로 변하여 처음 '양지(楊枝)'가 생겨났을 때의 의미 그대로 '이쑤시개'를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에 '양지'를 '이쑤시개'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쑤시개'를 아직도 '요지'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일본어의 영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쑤시개'가 '양지'나 '양치'와 동일한 뜻으로 쓰인 적이 없다. '이쑤시개'는 별도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니시개〔牙叉兒〕 <"역어유해보"(1715), "방언유석"(1778) 등에서>
니쑤시〔刺齒〕 <"국한회어"(1895)에서>
니쑤시〔剔齒纖〕 <"광재물보"(?)에서>

필자의 세대에서 '이를 닦는 일'은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서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좌우로 오가는 일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치분(齒粉)' 또는 '치마분(齒磨粉)'이란 가루약이 오늘날의 '치약' 대신에 등장하였고 곧이어 오늘날과 같은 치약이 등장하였다. 또한 그것과 동시에 '칫솔'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칫솔'이 없었을까? '니 닥' 샤'나 '초여집', '양치'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칫솔'과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니 닥 샤〔牙刷子〕 <"역어유해보"(1715)에서>
초여집〔牙簽筒〕 <"광재물보"(?)에서> [원래 '牙簽筒'은 '니시개 집'을 뜻하는 말이다.]
양치〔楊枝〕<"몽어유해보편"(1790) 권 상에서>
양치를 밧드러 내 <"홍루몽"(1884?)에서>

사실은 현재도 '양치질'과 '칫솔질'은 다른 의미이지만, 최근에 '칫솔'이 서양에서 유입되면서부터 '양치질'이 '칫솔질'과 동일한 의미가 되었다. 그래서 '칫솔'은 최근의 사전에 처음 나온 단어이다. '칫솔'이나 '치약'은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어사전"이나 문세영의 "조선말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 단어들의 조어법이 특이하다. '치'는 의존 형태소인 한자인데, 여기에 고유어인 '솔'이 붙은 것이다. 이들 '이'에 관계된 단어들(예컨대 '치실')이 '치'에 견인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