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표기법의 이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희원(鄭稀元) / 국립국어연구원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지배층 인사들에게는 일반인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대가 충족될 때 우리는 상류 계층 사람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는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진정한 상류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곧잘 인용되곤 한다. 이 말은 본래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는 프랑스 어 속담 Noblesse oblige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있거나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정신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말의 한글 표기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고, 지난 4월에 열린 '정부 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 위원회'에서는 많은 논의 끝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적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이 말의 프랑스 어 발음은 [n bl s bli ]이다. 논란이 되었던 [ ]는 rouge(루주), George(조르주) 등의 예에서처럼 프랑스 어 표기법에 따르면 '주'로 적히게 된다. 따라서 Noblesse oblige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적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말은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적어 온 관행이 있으므로, 이것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자료 검색을 해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사용된 웹 문서는 수 백 건씩 검색이 되는 데 반해, '오블리주'로 표기된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동안 이 말에 대해 특별한 어원 의식 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관용적으로 표기해 온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외래어 표기에 있어서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즉 외래어 표기법의 기본 원칙에는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쓰이어 이미 표기형이 굳어진 외래어는 그 관용 표기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Noblesse oblige의 한글 표기와 관련한 쟁점은 표기 원칙에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적을 것이냐, 아니면 관용을 인정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적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그런데 이 말이 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국내 주요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 등에는 이 말이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다. 언론 연구원의 자료를 조사해 보니, 이 말이 신문에 등장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당시 사용된 한글 표기는 신문에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즈',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지'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7년을 전후해서 이 말의 쓰임이 갑작스럽게 증가하게 되고, 또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표기형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표기형이 굳어져 사용되게 된 것은 채 10년이 못 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굳이 어원적 근거가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인정하기보다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외래어 표기 원칙에 맞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직후에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기획 기사를 연재하고 있던 한 신문에서는 당장 표기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바꾸었다. 이미 여러 회째 연재 중이던 기사의 제목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언어생활을 바르게 이끌어 가기 위해 국가의 어문 정책을 충실히 따르는 태도를 보인 그 신문사의 자세는 매우 믿음직하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