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잠드는 바람'의 상징성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불이 켜질 무렵
잠드는 바람 같은
목마름
진실로
겨울의 해질 무렵
잠드는 바람 같은
적막한 瞑目.
<'小曲', 晴雲, 1964>

박목월(朴木月, 1917∼1978)의 시 '소곡(小曲)'은 말 그대로 아주 짧은 노래로, 편안한 죽음을 바라보는 노래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핵심어는 맨 끝의 한자어 '명목(瞑目)'에 있다. '명목'의 뜻은 국어사전에 "① 눈을 감음. ② 편안한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자전에는 '명목(瞑目)'이 "눈을 감음. 전(轉)하여, 편안하게 죽음, 안심하고 죽음"으로도 풀이되고 있다. 이 말의 전거로는 "후한서(後漢書)" 24의 '마원전(馬援傳)'을 들고 있다.("今獲所願 甘心瞑目")
    명목의 뜻풀이를 알게 되면서, 간단히 2연 7구로 된 시가 그런 죽음에 관한 명상을 담고 있다니 하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시 서두에서는 별 충격적인 말도 없이, 해가 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저녁 시간을 '불이 켜질 무렵'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인생의 어둠에서 불이 켜질 무렵은 언제일까? 이 시에서는 '바람이 잠드는 때'라고 말한다. 제2연에서는 강도가 다소 강해지면서 '해질 무렵'이란 하루의 끝에다가 '겨울'이란 계절의 끝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겨울은 언제인가? 이 시는 그것이 '바람이 잠들어 아주 눈감을 때'라고 말한다.
    '바람이 잠드는 때'와 '바람이 잠들어 아주 눈감을 때'란 비유의 초점에 주목하면, 바람은 '인생'의 비유 대상임을 알 수 있고 계속 '잠드는' 행위로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바람의 속성이 원래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일렁이는 것이며 정지하지 못하는 존재임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런 바람이 '잠든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기류가 뭉쳐져서 일렁이다가 다시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잠드는 바람'은 제1연에서 '목마름'에 견주어지고 제2연에서는 '적막한 명목(편안히 눈을 감음)'에 견주어진다. 다소 목마른 현상이 나타났다가도 인생의 겨울이자 황혼이 다가오면 적막한 가운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아니 그런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바람에 의탁한 시인의 소망이 함축적으로 읽힌다. 다가오는 죽음을 '적막한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시인의 바람은 삶이 생동하는 젊은 독자들에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었거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바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온다는 것, 그리고 다가올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늙어 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이에게 예측 불허(豫測不許)의 불안함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잘 보여 준다.
    이 시는 해가 곱고 붉게 동쪽에 떠오르는 시기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해가 서쪽에 져서 어둠이 밀려왔을 때부터를 시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그때는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다소의 여유가 있을 때이다. 불이 켜진다고 밤인 것은 아니니까. 인생에서 초로(初老)의 시절이라고나 할까? 이때가 아직 인생에 대한 '목마름(갈증)'이 남아 있는 때라고 시인은 말한다. 젊은 시절에 못다 해 본 사랑이라든가 중년에 못다 해 본 성공이라든가 미처 살아 보지 못한 인생에 대한 꿈들을 시인은 '목마름'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간단히 물 한 모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목마름이 아님은 독자 모두가 잘 알 수 있다. 사실 박목월의 후기 시에는 '목마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시절도 다 가고 인생의 겨울이 와서 '진실로' 해가 질 무렵, 어둠을 대치할 그 어떤 켤 '불'도 없을 때가 오면 어떡하겠는가? 시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다시 시인에게 답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에 관해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 시는 그 어떤 불도 켤 수 없는 인생의 겨울이자 해 질 무렵의 그 마지막 순간이 오면, "적막한 (어둠) 가운데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으라."고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잠드는 바람처럼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다가오는 죽음을 안심하고 맞이할 수 있을까? 시인은 바람에게 그 답을 물어본다. "후한서"에 나오는 그런 '편안한 죽음'을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