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와 '벼랑'
홍윤표(洪允杓) / 연세대학교
'낭떠러지'와 '벼랑'은 경사가 심한 '언덕'이나 '비탈'을 뜻하는 단어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낭떠러지'는 '깎아지른 듯한 언덕', '벼랑'은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이라 풀이되어 있어서, 언뜻 보아 두 단어가 모두 '언덕'을 뜻하지만 '낭떠러지' 중에서 험하고 가파른 곳을 특별히 '벼랑'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에 따르면 '낭떠러지'나 '벼랑'이나 그 경사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낭떠러지'는 '낭'과 '-떠러지'로 분석됨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떠러지'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지다'의 뜻을 가진 '떨어지다'의 어간 '떨어지-'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표기가 '떨어지'가 아닌 '떠러지'로 되었을 뿐이다. 동사 어간 자체가 복합어의 후행 요소로 오는 경우가 드물어서, 일부 방언형에서는 '낭떠러지'를 '낭떠러지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낭'은 그 자체로서 '낭떠러지'를 뜻하는 자립 형태소여서 '-떠러지'와 통합되지 않은 단독 형태로도 사용되었었다.
이처럼 '낭' 자체가 '낭떠러지'의 뜻으로 사용된 시기는 대체로 19세기 말까지로 보인다(물론 오늘날에도 일부 방언형에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처음엔 '낭'으로만 사용하다가 이 단어의 원래 뜻을 잘 이해할 수 없게 되니까, 여기에 다시 '-떠러지'를 붙여서 그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 단어는 19세기 말에 생긴 단어인 것으로 보인다. '랑'이나 '넝'으로도 표기되었다.
여기에 비해 '벼랑'은 아무리 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별'과 '-앙'으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의 '-앙'은 물론 접미사이다. '별'은 '낭'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 현대 국어의 '벼랑'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었다. 고려 가요인 '정석가'에 나오는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 구은밤 닷 되를 심고이다"의 '별헤'의 뜻이 '벼랑에'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벼랑'은 가끔 '별'에 접미사 '-악'이 통합된 '벼락'으로도 나타난다. '벼락'이 천둥과 번개가 치고 벼락이 치는 '벼락'이 아니고 '벼랑'처럼 '깎아지른 듯한 비탈'을 뜻하는 단어가 또 있다. 방언형에서 "이 댐벼락(또는 '댐부락') 같은 녀석"이라는 욕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이때의 '댐벼락'(또는 '댐부락')은 '담벼락'에서 음운 변화를 겪은 것이다. '담벼락'은 '담'과 '벼락'이 합쳐진 말이다. '담'의 뜻은 다 잘 아는 것이고, '벼락'은 '벼랑'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벼랑'은 '낭떠러지'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지만, '낭떠러지'는 대체로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일컫는 단어이고 '벼랑'은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았을 때 일컫는 단어로 보인다. '낭떠러지'는 "낭떠러지 아래로, 발밑으로 낭떠러지가 있다."처럼 사용되어서 '위에서 내려지는 형상으로 된 비탈'을 뜻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벼랑'은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벼랑 위', '벼랑 아래', '벼랑 끝' 등으로 폭넓게 사용되어서 '낭떠러지'를 휘갑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한자어 '빙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