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조지훈의 고풍 의상(古風衣裳)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접(蝴蝶)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ㅅ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고풍 의상(古風衣裳)', "청록집ꡓ, 1946>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시 '고풍 의상(古風衣裳)'은 한복을 입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시인 특유의 풍류를 통해 보여 준다. 이 시에서는 요즘은 사라진 전통 한옥(韓屋)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데, 기와지붕 부연(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 끝에는 풍경이 울리고 처마 끝에는 주렴(구슬로 꿰어 만든 발)이 늘어져 있는데 그 사이로 반달이 보인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처마 끝의 풍경이 울려 댕강거리고 봄밤의 포근하고 아른아른함은 두견이 소리로 절정을 이룬다. 이때에 시적 화자가 제 흥에 겨워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라고 탄성을 발한다.
    그런데 탄성을 울린 시적 화자는 어디에 있나? 찾아보면 '풍경 소리'의 주인공인 '풍경'은 기와지붕의 바깥쪽으로 향해 올라간 '부연' 끝에 매달려 있다. 반대로 처마 끝에 매달린 '주렴'은 처마가 안쪽으로 향한 끝인 방문 앞에 늘어져 있다. 그 주렴 사이로 반달이 숨어 있다. 여기서 숨어 있는 반달을 그 주렴 안쪽에서 응시하고 있을 시적 화자의 모습이 짐작된다.
    제2연에 오면 밖으로부터 한복을 입은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파란 구슬 빛 바탕에 자줏빛 회장(回裝) 끝동을 댄 저고리를 입고 하얀 동정을 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치마의 묘사가 일품인데,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은 치마의 길이를 나타내고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은 치마가 둥글게 퍼진 모양을 말하는데 바로 그 열두 폭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제1연에서 '아른아른'한 봄밤의 모습과 제2연의 한복을 입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살살이', '사르르'와 같은 의성, 의태어를 통해 감각적인 심미감을 불러일으킨다.
    제3연에 오면 여인은 치마 끝에 보일락말락하는 운혜(마른신)인지 당혜(가죽신)인지를 신고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마루(오늘날 거실)를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화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다. 그 순간 시적 화자는 다시 한번 경탄하게 된다.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나비)'인가 하고. 그리고 나비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고 권한다. 아미(미인의 눈썹)를 숙이고 다소곳하게 춤을 추라고. 그러면 화자는 눈을 감고 거문고 줄을 골라 춤 곡조를 맞추겠노라고 풍류객다운 장단을 보인다. 그러면 그대는 흰 손을 버들같이 늘어뜨리며 춤을 춘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심미적 쾌감은 소리와 형태로 나타나는데, 모든 소리는 한옥의 아름다움이 깃든 풍경 소리, 봄밤의 두견이 소리, 화자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로 모아진다. 시각적 선의 심미감은 하늘로 날듯이 길게 뽑은 기와지붕에 올린 부연 선이나 처마 끝에 곱게 늘인 주렴, 한복에서 둥글게 뽑은 저고리 선이나 '살살이' 주름 잡아 둥글게 퍼진 열두 폭 치마 선으로 모아진다.
    이들 사이에 문맥에서 빚어내는 병치성(竝置性)이 발생한다. 하늘로 날듯이 길게 뽑은 한옥의 부연 선은 여인의 한복에서는 파란 바탕에 자줏빛 회장 저고리의 둥글게 뽑은 선과 병행되고, 처마 끝에 길게 늘인 주렴의 형태는 한복을 입은 여성의 치마에서는 주름이 잡혀 직선으로 '살살이' 펴져 내리다가 곡선으로 사르르 물결치는 모습에 비견된다. 그리고 운혜나 당혜의 신발은 대청마루에 병행되고 주렴 사이로 보이는 (하얀) 달마저 한옥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로 등장한다. 이들 형태적 유사성은 시적 화자의 거문고 연주에 맞추어 '한 마리 호접'처럼 춤추는 여인의 모습으로 절정에 오른다. 구체적인 대응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파란) 기와지붕(부연, 처마)의 둥근 선 ------------------파란 저고리의 둥근 선(상)
주렴 사이로 보이는 달 --------------------------------하얀 저고리 동정(상·중)
늘어뜨린 주렴 ---------------------------------------열두 폭 치마(중)
대청마루 -------------------------------------------운혜, 당혜(하)

이들의 유사성은 '처마 끝'과 '초마 끝'의 소리 반복에서도 짐작된다. 제1연의 둘째 줄 첫 구절이 '처마 끝'이듯이 제3연의 첫째 줄 첫 구절이 '초마 끝'인 데서도 시인의 의도적 병치(竝置)를 엿볼 수 있다. 제3연의 '초마'가 '여성이 입는 '치마'임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처음에는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혹은 경상도 사투리로는 '치마'를 '초마'라고 하나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초마'는 '처마'의 방언이기도 하고 '치마'의 방언이기도 하다.
    예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전통 가옥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성이 걸어오는 모습에다 시적 화자의 거문고 소리가 가세함으로써 고전미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렇듯 화자가 제1연에서 외친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의 대상은 처음에는 한옥의 모습이었다가 한복을 입은 조선의 여인으로, 더 나아가서는 이들을 감상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는 시인 자신까지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