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어의 이해

'밤을 패다'

전수태(田秀泰) / 국립국어연구원

멀리 제주도에서 꽃 소식이 들려오는데 서울 지방에는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이다. 산골짜기의 잔설이 녹으면 이 금수강산에 봄이 찾아올 것이다.
    이번에도 지난번에 이어 우리에게 생소한 북한 말을 소개하기로 한다.

'가족주의'라는 말은 남한에서는 '개인보다는 가족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고 방식'의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몇몇 사람끼리 비원칙적으로 정실 관계를 맺고 서로 싸고 돌면서 조직보다 자기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고 방식'을 말한다. 이 경우 '가족'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서는 각종 동창회, 향우회 등의 모임도 없다.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회의 통념 때문이다. "좋소, 그따위 가족주의루 엄중한 죄행을 감싸려고 하는 당신들도 다같이 책임질줄 아오!"<"언제나 한마음", 60>처럼 쓰인다.
    '도제'는 우리 사전에서는 '도저히'의 잘못된 표현으로 되어 있고, 북한 사전에는 '도저히'의 준말로 나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문맥에 따라서는 '겨우'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오늘은 이 등판을 다 끝내야겠는데 이거 뭐 도제 네집밖에 안 되니까"<"숲은 설레인다", 347>, "참외를 따오려면 밭에 걸 다 따오지 도제 고걸 따와? 누구 코에 바르자구..."<"아들들", 396> 등으로 쓰인다.
    '빳빳이'는 남한에서는 '굳고 꼿꼿하거나, 억세거나 풀기가 센 모양'을 나타내지만 북한에서는 '일정한 한도에 가까스로 들어차거나 좀 모자랄 정도로 여유가 없이'의 뜻으로 쓰인다. "부식물도 빳빳이 들어와 속태우는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그들의 하루", 354>와 같은 예가 보인다.

한편, 아래와 같은 관용구도 보인다.

'밤을 패다'는 '밤을 새우다'의 의미이다. "우리 군의들이 코피를 쏟아가며 교대두 없이 수술실에서 밤을 패구있는데 나만 허겁지겁 자기 애인을 찾으러 다니겠니?"<"나의 행복", 334>처럼 쓰인다.
    '손맥이 풀리다'는 '실패하거나 실망하여 사기나 의욕이 떨어지고 기운이 빠지다'의 의미이다. 한편, '손맥을 놓다'는 '일손을 놓다'의 뜻으로 쓰인다. "우리가 여기 남자구 한건 근삼이를 믿구 그랬는데 이제야 손맥이 풀려서 어떻게 수류탄을 만들겠나?"<"언제나 한마음", 19>와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얼굴이 넓다'는 '사귀어 아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데 우리말로는 '발이 넓다'의 의미에 해당한다. "지난 해에두 국가지표마저 짤리울번한걸 이 경준이가 하두 얼굴이 넓어서 겨우 눌러놨어."<"고향으로 온 련대장", 410>와 같은 예가 있다.
    '제기를 접수하다'는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다'의 뜻이다. "우리 사로청조직에서는 옥봉동무의 제기를 접수하고 로력공수는 자체로 해결하자고 했습니다."<"열네번째 겨울", 309>와 같은 예가 보인다. 여기에서 '사로청'은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의 준말이다.

3월이다. 꽃샘바람이 지나가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에 훈풍이 불어올 것이다. 힘들게만 생각되는 남북 사이의 모든 문제가 눈 녹듯이 쉽게 풀리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