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가을 하늘의 마법적 기능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골-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은 어린다.
('少年')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시 '소년(少年, 1939년)'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선연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시는 소년이 바라는 결핍의 해소에 대한 상상력에서부터 온다. 즉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는 구절에서부터 '떨어지는 단풍잎', 아니 '떨어지는 가을'에 대한 아쉬움이 나타난다. 여기서 '떨어지는 단풍잎'은 단순한 '단풍잎'이 아니라 단풍잎으로 비유된 '가을'이 떨어지는 것이다. 가을이 떨어진다는 심각한 결핍의 상황을 느끼면서 시적 화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펼쳐 있다." 이렇게 소년이 어떤 강렬한 소원을 품고 정면으로 실제의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하늘은 소년의 눈에 들어와 액체처럼 흘러내려 소년의 얼굴로, 손바닥으로, 급기야는 눈을 감은 소년의 마음속까지 흘러들어 간다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하늘은 어떤 황홀한 약속을 보여 주면서 슬그머니 소년의 마음속에 액체로 스며들어 온다.
    하늘이 수직적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은 먼저 하늘이 소년의 눈으로 흘러들어 왔다가 다시 볼로, 손으로, 손바닥으로, 가슴속으로 계속 흘러들어 온다. 하늘의 액체 이미지는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물감이 든다', '묻어난다', '흐른다' '어린다' 등과 같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흐르는 물체'를 표현하는 서술형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파란 하늘은 고개 들어 위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눈썹)에 수직으로 흘러내려 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액화(液化)되어 뚝뚝 떨어지고, 볼을 쓸어 보는 손바닥에 물감처럼 묻어나고, 손바닥은 샘물이 되어 물이 솟아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그 웅덩이에서 마법의 거울처럼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비쳐 보여 준다. 이 모든 가을 하늘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기능은 다음과 같은 비유 체계로 이루어진다.

하늘-------------------------손바닥--------------------강물
x앙상한 나무가지들-------------x갈라진 손금---------------x갈라진 강물 줄기
x파랗다------------------------x파란 물감 든손바닥---------x파란 강물
x액체화된다--------------------x눈에 어린다----------------x물에 비친다

하늘, 손바닥, 강물의 세 이미지는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소년이 눈을 들어 본,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은 단풍잎 떨어져 나뭇가지들만 파란 하늘에 이리저리 걸려 있다. 마찬가지로 내 손금에도 줄이 그어져 있고, 강물도 이리저리 갈래 져 흐른다. '갈라지다'의 공통점 외에도 '파랗다', '비치다'라는 강물의 이미지가 겹쳐 있다. 이런 가을 하늘의 '마법적' 이미지는 미래를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마법의 거울' 이미지를 낳는다.
    이 시에서 가을 하늘은 단순한 풍경화적인 가을 하늘에서 더 나아가 자연의 법칙을 알려 주는 어떤 존재이기도 하다. 소년은 현재 슬프다. 그것은 아름다운 단풍잎이 떨어져서이고 소녀가 떠났기 때문이다. 가을에 단풍나무와 단풍잎이 이별하는 모습은 마치 소년이 소녀와 떨어져야만 하는 것 같은 모순의 상황이므로 '슬픈 가을'과 '사랑처럼 슬픈 얼골'이라는 '슬프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런 현실의 '슬픈' 모순적 상황을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파란 하늘이 가진 마법적인 힘뿐이다. 흔히 말하는 마법의 거울은 미래가 거울에 나타난다는 예언적 힘을 가진 거울을 말하는데, 이 시에서는 소년의 손바닥 웅덩이에 고인 강물에 비치는 거울의 예언적 기능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마법의 예시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 어떤 변치 않는 법칙을 지닌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말함이고 미래를 꿈꾸는 소년에게는 행복한 미래, 모순된 현재의 상황을 해결해 주는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심어 주는 어떤 가능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