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

'색치'와 '겜맹'

박용찬(朴龍燦) / 국립국어연구원

인간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사라지거나 생겨나면서 그에 대한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회의 변화 속도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급격한 사회 변화로 하여 새말 즉, 신어가 더욱 더 필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말은 아예 새로이 만들어내기보다는 현존하는 말들을 적절히 응용·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대부분이다. 즉, 새말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말들을 가지고 그것에 약간 변형을 가해서 만들어 낸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한자어계 접사를 이용해서 새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만들어져 사용되는 신어 목록를 살펴보면 몇몇 특이한 한자어계 접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은 본래는 접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던 것이었는데 최근 들어 접사로서 아주 생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치(癡/痴)'와 '맹(盲)'을 들 수 있다.

(1) ㄱ. 심각한 '길치'라서, 이사하면 동생들이 길에 마중을 나와 있어야 할 정도예요. <월간조선 2001년 9월호>
ㄴ. 난 소문난 '몸치'예요. 게다가 몸매가 다 드러나는 타이츠를 입고 어떻게.... <동 아일보 2001년 3월 7일>
(2) ㄱ. ...우리 기업인들도 그들과 당당히 맞서 국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친숙한, 즉 컴맹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동아일보 1994년 8월 22일>
ㄴ. ○○○는 최근 대화를 통해 전자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 해 '넷맹'들도 사이버 거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매일경제 2000 년 4월 7일>

(1)의 '길치(-癡)'와 '몸치(-癡)'는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2000년 신어"에도 올라 있는 신어들인데 이들 신어에 보이는 '치'는 '癡' 또는 '痴'로 일부 한자 뒤에 붙어 '어떤 사물에 잘 적응하지 못함' 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런 속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2)의 '컴맹'과 '넷맹'도 각각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신어의 조사 연구"(1994)와 "2000년 신어"에 올라 있는 신어이다. 이들 신어에 보이는 '맹'은 '盲人'이 줄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일을 할 줄 모름. 또는 그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먼저 '치(癡/痴)'는 아래 (3)의 '음치(音癡)', '백치(白癡)', '서치(書癡)', '정치(情癡)', '천치(天癡)' 따위처럼 일부 한자 뒤에 붙는 말로 현대어에서 자주 쓰이는 편이라 하기 어렵다. (1)의 '길치'과 '몸치'는 이 예들에 유추되어 만들어진 말로 '길을 잘 찾지 못하고 한 번 갔던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과 '춤을 잘 못 추는 사람'을 각각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예에서 '치(癡)' 앞에 오는 말인 '길'과 '몸'은 순수 고유어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현대어에서 '치(癡)'는 그 앞에 오는 말이 한자로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그 기능도 거의 접미사화한 것으로 보인다.

(3) ㄱ. 음치(音癡) 「명」 소리에 대한 음악적 감각이나 지각이 무디어 음을 바르게 인식하 거나 발성하지 못하는 사람.
ㄴ. 백치(白癡/白痴) 「명」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박약한 것. 또는 그런 사람.
ㄷ. 서치(書癡) 「명」 글 읽기에만 온 정신을 쏟고 다른 일은 돌아보지 아니하는 어리 석음. 또는 그런 사람.
ㄹ. 정치(情癡) 「명」 색정에 빠져서 이성을 잃음. 또는 그런 사람.
ㅁ. 천치(天癡/天痴) 「명」 =백치(白癡/白痴).
[이상의 뜻풀이는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1999)을 참조하였음.]

오늘날 '치'는 아래 (4)의 예에서처럼 신어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색치(色癡)'는 '색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이 매우 무디어 색을 바르게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을, '박치(拍癡)'는 '박자(拍子)에 대한 음악적 감각이나 지각이 매우 무디어 박자를 바르게 인식하거나 발성하지 못하는 사람'을, '기계치(機械癡)'는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각각 가리킨다.

(4) ㄱ. 이토록 과학 이상으로 자연의 색채 섭리를 이미 터득하고 원색 이외의 색 이름을 지 어 놓지 않은 조상님들의 높은 색채 안목 앞에서 색치(色癡) 문화 운운하며 건방을 떨었다는 것이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가. <중앙일보 2001년 9월 1일>
ㄴ. 듣기에도 부담스러운 갈라지는 목소리에, 음정, 박자도 제멋대로인 구제 불능의 박치, 음치인 그가 부른 노래가 인터넷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에 힘입어 정식 음반을 내고 가수에 도전한다. <일간스포츠 2001년 5월 31일>
ㄷ. 컴퓨터를 모르는 '기계치'들도 인터넷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척 많이 연결돼 있 다는 것쯤은 안다.
 <시사 주간지 뉴스플러스 1999년 3월 4일(통권 173호)>

반면 '맹(盲)'은 본래 아래 (5)의 예들에서처럼 일부 한자 뒤에 붙어 '눈멂. 눈먼 사람'을 의미한다. (2)의 '컴맹'과 '넷맹'은 각각 'computer+盲人'과 'internet+盲人'으로 분석되며 '컴퓨터에 대해 무지함. 또는 그런 사람'과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줄 모름.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예에서 '맹(盲)' 앞에 오는 말인 '컴'과 '넷'은 외래어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대어에서 '맹(盲)' 또한 '치(癡/痴)'와 마찬가지로 그 앞에 오는 말이 한자로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그 기능도 거의 접미사화한 느낌마저 준다.

(5) ㄱ. 계맹(鷄盲) 「명」 밤눈이 어두워 밤에 사물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
ㄴ. 군맹(群盲) 「명」 ① 많은 장님. ② 많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ㄷ. 농맹(聾盲) 「명」 귀머거리와 장님을 아울러 이르는 말.
ㄹ. 문맹(文盲) 「명」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름. 또는 그런 사람.
ㅁ. 색맹(色盲) 「명」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이 불완전하여 빛깔을 가리지 못하거나 다 른 빛깔로 잘못 보는 상태. 또는 그런 증상의 사람.
ㅂ. 야맹(夜盲) 「명」 망막에 있는 간상세포의 능력이 감퇴하여 밤에 사물이 잘 보이지 아니하는 증상.
ㅅ. 주맹(晝盲) 「명」 밝은 곳에서의 시력이 어두운 곳에서보다 떨어지는 증상.
ㅇ. 중맹(衆盲) 「명」 ① 많은 무리의 소경. ② 많은 어리석은 사람.
ㅈ. 청맹(靑盲) 「명」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
ㅊ. 회맹(晦盲) 「명」 ① 어두워 보이지 아니함. ② 사람에게 알려지지 아니함. ③ 세상 이 어지러워 막막함.
[이상의 뜻풀이는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1999)을 참조하였음.]

'맹(盲)'은 아래 (6)의 예에서처럼 신어를 만드는 데 아주 생산적이다. 여기에서 '겜맹'은 'game'과 '盲人'이 결합한 말로 '컴퓨터 게임을 전혀 할 줄 모름. 또는 그런 사람'을 '책맹'은 '책(冊)'과 '맹인(盲人)'이 결합한 말로 '문자도 알고, 일정 교육도 받아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책 읽기를 싫어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6) ㄱ. 컴맹, 넷맹, 겜맹은 요즘 신세대들에게 구제 불능의 3대 백치. <크레지오 홈 페이지 에서>
ㄴ. 책을 모르는 책맹은 글을 모르는 문맹보다 더 위험하다. 문맹은 자기의 무지를 자인 하지만 책맹은 자신이 무지한 줄 모른다. <한국일보 1992년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