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조지훈(趙芝薰)의 시 '여운(餘韻)'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물에서 갓 나온 女人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塔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지움(수집음)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재빨리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그 얼굴을 엿보았을까
어디서 보아도 돌아선 모습일 뿐
永遠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
塔이여!
바로 그때였다 그는
藍甲紗 한 필을 허공에 펼쳐
그냥 온몸에 휘감은 채로
숲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층
두 층
발돋음하며 나는
걸어가는 女人의 그 검푸른
머리칼 너머로
기우는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몸매에는 바람 소리가
잔잔한 물살처럼
감기고 있었다.
(餘韻)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시 '여운(餘韻)'을 읽으면 웬 여자의 누드화가 나타나는가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잘 읽어 보면 달밤에 탑을 돌면서 심미적 황홀경에 빠져 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탑을 비치는 조명은 달빛이고 시간은 달빛이 비치는 짧은 동안이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물에서 갓 나온 여인의 모습을 보는 착시(錯視) 현상으로 시작한다. 물에서 갓 나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여인을 바라볼 때의 충격(?)과 놀라움(?)은 바로 달빛 비치는 숲 속에 서 있는 낯선 돌탑을 바라보는 눈길이 된다. 이와 같이 탑을 둘러싼 풍경과 목욕한 여인의 이미지가 병치(竝置)하면서 두 개의 이미지 군을 형성하고 있다.
    먼저 제1~4연까지의 이미지 군을 살펴보자.

<탑의 이미지> <여인의 이미지>
달빛
물기

여인의 몸
풀냄새
몸의 윤기
탑 뒤의 숲
머리채
그림자가 흔들린다
어깨 위에 출렁인다

제5연에 오면 시적 화자가 벗은 여인 곁으로 다가서자 여인은 흠칫 놀라서 수줍어하며 돌아서 버렸다. 여인의 '희디흰 얼굴'이라는 표현으로 오래 전에 만들어진 탑의 내밀한 모습에 접하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벗은 여인에 접근하는 남성에 대해 흠칫 놀라 돌아서는 여인의 심리적 반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국 탑이 왜 생겼는지, 어느 선사의 유골을 담고 있는지, 어느 장인이 돌을 쪼아 돌아가신 이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불심(佛心)을 담아 만들었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움을 '여인의 희디흰 얼굴'을 볼 수 없음으로 표현한다.
    제5~7연에서는 탑의 겉 묘사에서 벗어나 탑이 지닌 역사적, 예술적, 불교적 가치를 생각하는 시인의 시선이 나타나는데, 여인의 이미지로 보면 목욕한 여인이 갑자기 남의 시선에 접하자 남갑사(藍甲紗) 한 필을 걸치고 황황히 모습을 숨기는 동작으로 나타난다. 즉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예술품의 심미적 가치에 관한 관심이 탑의 비밀로 나타난다.

<탑의 이미지> <여인의 이미지>
탑의 내밀한 모습
희디흰 얼굴
탑의 비밀
영원히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여인

그런데 고전적 여인이 남갑사 한 필을 걸치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탑의 이미지에서 탑이 걸어간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7~8연에서 나타나는 비유적 이미지 군에서는 시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과 달빛이 기울면서 검푸른 빛으로만 나타나는 탑의 영상이 겹쳐지고 있다.

<탑의 이미지> <여인의 이미지>
어두운 숲과 탑의 영상
남갑사 한 필을 온몸에 휘감다
탑의 영상이 안 보임
숲 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다.
탑의 맨 위층의 모습만 보임
멀어지는 여인의 검푸른 머리칼만 보임

제9연에서 자연 조명인 달빛이 사라지자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도 동시에 사라지면서 물에서 나온 여인의 '아련한 몸매'가 풍기는 여운이 잔잔한 물살처럼 탑신에 감기고 있다는 것으로 시를 끝맺고 있다. 돌탑에 비치는 달빛의 촉촉한 질감과 물에서 갓 나온 여인의 촉촉한 감각에 대한 감정적 물살이 달빛에서 바람 소리로 이어지면서 시인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조지훈의 시에서는 늘 이렇게 각성(覺性, awakening)의 시간이 흐르고 그 선택된 시간 안에서의 몰입을 통해 미적 체험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