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외래어 표기와 한글

남기심(南基心) / 국립국어연구원장

우리의 표기법 중에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여러 외국어에서 들어온 말들에 대한 표기가 사람마다 달라서 이를 통일하여 규칙화하기 위한 것이다. 지형적 조건이 외부와 완전 차단이 되어서 바깥 세상과 절연이 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 문화는 반드시 다른 문화와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만나서 그쪽의 문물이 들어오게 되면 그러한 문물을 가리키는 새말을 만들어 쓰거나, 그것이 번거로우면 아예 그쪽의 말을 그대로 들여다가 쓰게 된다.
    지난날 개화기에 우리가 비록 일본을 통해서이기는 했지만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로 생겨난 말로 '비행선(비행기)', '자래화(가스)', '육혈포(권총)', '활동사진(영화)' 등과 같은 말도 있었고, '양복', '양옥', '양산', '양철', '양동이' 등과 같이 서양에서 들어왔거나 서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양-'을 붙여서 만든 말도 있으며, '커피'를 '가배', '러시아'를 '아라사' 등으로 원어를 그대로 들여다가 쓰기도 하였다.
    서양 외래어는 그 후로 계속 늘어나 지금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외래어를 가만히 살펴보면 옛날에 들여온 것일수록 원어의 발음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근래에 들여온 것일수록 원어의 발음에 가깝다는 특징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그동안의 외국어 교육에 힘입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국어 능력이 계속해서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외래어는 발음도 원어와 똑같이 해야 하고, 표기도 원어의 발음과 일치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우리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정확한 표기가 불가능하다고 불평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 문맥 속에서 쓰이는 외래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외국어에서 들어와 우리말이 된 우리말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외래어는 당연히 우리말의 음운 법칙에 따라서 발음하고 우리 글을 가지고 우리말을 적듯이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글이 아무리 만능이라지만 그것은 우리말을 적는 데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 국어에 없는 소리까지 적을 수는 없는 것이며, 발음도 국어의 음성 체계 속에 없는 것은 할 수가 없다. 일본 사람이 우리말 '김치'를 '기무찌', 영어의 '트럭'을 '도라꾸'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음운 구조상 그렇게밖에 달리 발음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 모어의 발음 체계에 없는 소리는 발음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경상도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ㅆ'의 발음을 못해서 '쌀'을 '살'이라고 한다.
    외래어의 표기를 원음과 일치하게 표기하기 위해서 한글을 변형하거나 부호를 덧붙여 쓰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일본어의 이른바 탁음이나 영어의 g, d, b 등과 같은 유성 자음을 적기 위해 'ㄱ, ㄷ, ㅂ' 등에다가 일본어의 탁음 표시와 같은 점을 찍어서 표기하자든가 하는 주장이 그러한 것인데, 외래어를 적기 위해 자기 나라 문자를 변형해서 쓰는 나라도 없거니와 어차피 발음도 할 수 없는 소리를 글자까지 변형해서 표기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외래어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말 문맥 속에서 쓰이는 외래어는 우리말의 일부로 쓰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외국어의 문맥 속에서 외국어로 말을 해야 할 때는 원음과 같게, 혹은 원음과 가깝게 발음을 해야 하지만 그것은 외국어로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