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논쟁 특집

제주 도민을 국제 떠돌이로 만들 셈인가?

최용기(崔溶奇) / 국립국어연구원 연구관

정부(건설교통부)와 민주당은 당 정 협의회를 열어 제주도를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국제 자유 도시로 개발하기 위해 제주도 내에서 영어를 제2 공용어로 만드는 특별 법안을 만든다고 지난 5. 14일에 발표하였다. 언뜻 듣기에는 제주도를 관광 특별 지역으로 지정하여 지방 도시에서 변신을 꾀하고 국가의 경쟁력을 향상시킨다고 하니 매우 훌륭한 생각인 듯하다. 아마도 제주 도민은 귀가 솔깃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용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와 민족성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 정책을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는 건설교통부와 민주당의 태도는 옳지 못하다. 당연히 주관 부처인 문화관광부와의 협의 과정도 필요하겠지만(문화관광부는 반대 입장), 언어는 인간에게 있어서 의사 전달의 필수 요건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고 민족을 결속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제주도와 비슷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는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서는 주민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서 영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하겠다고 하여도 일본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역 말(방언)을 잘 보존하도록 하고 방언 조사에 많은 국가 예산을 쓰고 있다고 한다.
    불과 몇 해 전에 문민 정부에서 ‘세계화’의 구호 아래 영어를 제2 모국어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영어 조기 교육을 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영어를 잘하면 국제 경쟁력이 생겨 선진국이 되고 국제 무대에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문민 정부는 많은 예산을 들여 실천에 옮겼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성과는 별로 없고 졸속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사교육비 추가 부담이라는 짐만 떠 맡겼다.
    지금 제주도는 육지 사람과 외국인들로 뒤섞이어 제주도 말(방언)이 혼탁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더구나 학교에서는 표준어(서울 말)를 가르치기 때문에 표준어를 익히는 것도 버거운 일이 되었다. 그런 데 영어를 또 다시 공용어로 지정한다면 제주 도민의 언어생활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는 많은 예산을 들여 교육 시설을 새로 해야 하고 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만약 이 계획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제주 도민들은 세 언어(지역 말, 서울 말, 영어)를 익혀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만약 정부에서 관광 수입을 늘리기 위해 여러 나라의 언어가 필요하다면 외국어 전문가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거나 주요 국가의 말로 된 안내 책자를 더 많이 만들어 배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어 정체성의 문제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표현을 빌리 지 않아도 언어가 단순한 의사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고 민족의 사고까지 지배한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주장한 바가 있다. 제국주의자들이 그토록 식민지 국가의 언어를 말살하고 자국의 언어를 강요하고 전파하고자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충분히 겪지 않았던가? 언어의 특성을 알고 이를 악용한 제국주의자들의 계획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스스로 우리 국토의 일부를 떠내어 영어 사용자에게 내주고 제주 도민을 국적도 모르는 국제 떠돌이로 전락시켜 제2의 만주족을 만들겠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제발 불필요한 사업에 국가 예산을 더 이상 낭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최종 결정을 유보하겠다는 발표가 지난 7월 22일에 있었다. 차라리 철회하겠다고 발표하면 얼마나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