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논쟁 특집

영어를 공용어로 할 수 없는 이유

박병수(朴秉洙) / 경희대학교 영어학부 교수

외국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든 제주도와 같은 일부 지역에만 관광 목적으로 하든 이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스로 외국어를 끌어들여 자기 모국어와 나란히 공용어로 채택한 일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 현재 동남아와 아프리카 제3 세계 국가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지만 그들이 그것이 좋아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식민 통치의 결과로 모든 국가 체제가 영어 없이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심각한 부작용과 혼란을 감수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인도,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 다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어느 한 민족의 언어를 공용어(=국어)로 할 경우 모든 다른 민족들이 다 같이 절대 반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모든 민족들이 공평하게 손해를 보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겠는가?

둘째, 복수의 공용어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과 충돌이 심각하다. 불어와 영어가 경쟁 관계에 있는 캐나다의 퀘벡에서는 지난 200년 동안 불어권과 영어권이 민족적, 사회적으로 대립해 왔으며 퀘벡을 캐나다에서 완전히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까지 나오고 있다. 유럽의 벨기에에서는 불어권과 화란어권의 갈등 양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세계적 명문이던 루뱅 대학이 이런 언어 갈등에 휘말려 대학이 둘로 쪼개졌고 이 와중에 저질의 지방 군소 대학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셋째, 언어권 분열은 사회 분열을 낳고 민족의 화합을 해치는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 인도에서 영어가 공용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소수의 기득권층이고 절대 다수 빈곤층은 자기 모어밖에 모르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계층 사이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미국, 호주, 중동 등 외국으로 이민을 통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

넷째, 한 지역에 복수의 언어가 불평등적으로 공존할 때 약세의 언어가 소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20세기에는 미 대륙에서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들이, 동북 아시아에서 만주어가 그렇게 해서 지구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 나라의 말이 소멸의 위기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 스스로 외국어를 공용어로 끌어들이는 횡포를 저지를 수 없다.

어떠한 명분도―효과적인 영어 교육, 경제 발전, 세계화 현상 등등―영어 공용어화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