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의 이해

박목월(朴木月)의 시‘불국사’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연구원

흰달빛
紫霞門
(흰 달빛
자하문)
泛影樓
뜬그림자
(범영루
뜬 그림자)
달안개
물소리
(달안개
물소리)
흐는히
젖는데
(흐는히
젖는데)
大雄殿
큰보살
(대웅전
큰 보살)
흰달빛
紫霞門
(흰 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솔소리
(바람 소리
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佛國寺’)

한국 불교에서 달 그림자 또는 달빛이 불법(佛法)을 상징했음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박목월(朴木月, 1917~1978)의 시 ‘불국사’에서는 달이 오히려 무명(無明)의 평범한 신도로 나타난다. ‘무명’이란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실제의 불국사는 안개와 구름을 토한다는 경주 토함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신라인이 꿈꾸어 온 이상향인, 불국 정토를 형상화하고자 창건하였다. 청운교, 백운교를 건너면 자하문이 나온다. 자하문에서 범영루(종루)나 좌경루를 지나 금당 옆문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을 뵙게 된다. 긴 회랑들은 자하문, 범영루, 경루, 강당(무설전) 등 큰 건물들과 어깨를 겯고 둘러서서 불교 신앙의 대상인 대웅전과 탑을 중심에 두고 감싸 보호하듯 배치되어 영산 정토의 울타리를 이루며 부처님 세계의 여러 전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하는 구도로 지어졌다. 불국사 참배객이 다 떠난 한밤중에 달빛이 등장하는 과정도 이와 같다. 달빛은 일반 신도처럼 자하문으로 들어가 대웅전 큰보살을 만나 뵙고 연이어 범영루의 물그림자에 닿는다.
    시 ‘불국사’의 구조를 보면, 짤막한 명사로 이루어진 이 시는 자연물과 절의 건물이 각 연별로 대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각 연은 두 구의 명사로 이루어져 수직적으로 보면 앞 구는 위〔上〕의 물체를, 뒤 구는 아래〔下〕의 물체를 나타내어 위가 아래를 감싸는 대립 구조로 되어 있다. 흰 달빛은 자하문을 굽어보고 달안개는 물소리를 내려다본다. 범영루는 뜬 그림자의 위에 있는 실체이며 바람 소리는 물소리 위에서 들린다. 제3연 ‘대웅전/큰보살’만은 전체가 중심을 감싸는 수평적 구조이지만 그 포괄적인 구성은 수직적 구조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제6연의 ‘부사/동사’ 형태는 제외된다.
    다음으로, 이 시는 반복 구조로 되어 있다. 제3연 ‘大雄殿/큰보살’과 제5연의 ‘泛影樓/뜬그림자’를 보면 앞 구는 한자어, 뒤 구는 고유어로 앞의 뜻을 반복하면서 나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제3연에서, ‘큰’과 ‘大’처럼 고유어와 한자어로 대응되어 있으며 대웅전이 곧 ‘큰보살이 계신 곳’, 다시 보면 환유(換喩, metonymy: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 관계이다. 제5연의 범영루도 ‘뜰 범(泛)’자와 ‘비칠 영(影)’이 결합한 글자로 고유어로는 ‘뜬 그림자’이다. 앞 구는 한자어이고 뒤 구는 같은 뜻의 고유어가 절묘하게 결합하였다. 원래 ‘범영루’란 명칭은 그 그림자가 구품영지(九品影池)에 비친다고 하여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 시에 흐르는 물소리는 바로 그 연못에서 나는 소리이다.
    참배객이 다 떠난 한밤중에 마치 애숭이 신도처럼 불국사에 멋 모르고 들어온 달빛은 안개와 결합하면서 모습이 반쯤 변한다. ‘흰달빛’(제1연)/‘달안개’(제2연). 즉 달이 처음 불국사에 들어올 때는 빛이었다가 자하문을 들어서자 안개(‘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을 뜻함.)와 결합하면서 액체화한 것이다. 대웅전 큰보살을 뵙고 난 뒤 범영루에 오면 이제는 ‘흐는히’ 늘어져 연못 속에 깊이를 지닌 존재로 완전히 젖어 든다. 바로 불법(佛法)이란 깊이에 젖은 것이다. 연못 속에 목욕하듯 굼실대던 달빛은 다시 자하문을 나온다. 이제 달빛이 돌아가는 길에 바람 소리와 물소리는 번뇌를 다 벗어버린 신도의 마음인 양 텅 빈 공간을 채우며 소리 낸다. 달과 불국사가 만나 달은 이제 불교적 이념 구현을 상징하게 되었다. 평범한 신도였던 달은 우연히 불국사에 들렀다가 무명의 때를 씻고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