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미’와 ‘달래’


최홍길(崔洪吉) / 선정여자중학교

봄도 오고 해서 교과 수업을 하기 전, 우스갯소리 한마디부터 했다. 우리 반에는 ‘보미’라는 이름과 ‘달래’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있다.
   “이제 봄이 왔으니 우리 함께 달래나 캐러 갈까? 보미와 달래는 물론 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꼽겠지?”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의 반응은 처음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와!” 하다가 이내 “선생님 추워요.”로 변해 버린다. 어려운 문법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학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꺼낸 이야기가 ‘재미’건 ‘썰렁’이건 일단 합격점에 이르렀다고 자평(自評)한 나는 도수(度數)를 약간 높였다. 물론 수업과 연관된 내용이었다. 분필을 들고 칠판에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일전에 내가 어떤 레스토랑에 갔는데, 그곳 웨이터가 내 와이프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그게 뭐예요?”
   고의적으로 설명 없이 시간을 끌었더니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얘들아, 외래어나 외국어가 많이 들어간 문장이지? 자, 이걸 순 우리말로 고쳐 볼까?”먼저, 레스토랑과 웨이터, 와이프에 색분필로 밑줄을 그었다. 이 세 단어만 우리말로 고쳐 보자는 뜻이었다. 학생들의 발표에 따라 웨이터를 ‘일하는 사람’으로, 와이프를 ‘아내’로, 레스토랑을 ‘음식점’ 또는 ‘식당’으로 적어 나가자 어떤 학생이 음식점이나 식당은 한자어이기에 ‘밥집’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교실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자칭 ‘국어통’인 어떤 학생은 ‘일전에’도 ‘지난날에’로 바꿔야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와!” 하며 친구의 해박한 지식을 부러워했다.
   지금도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 경상도 두메 마을, 전라도 섬 마을 등지에 사시는 할머니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기에 순수한 우리말을 많이 쓰고 있다고 설명하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도 섬 마을이 고향인데, 방학 때 그곳에 내려가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람의 본명을 부르는 대신 ‘놀수’, ‘악보’, ‘퍼뜩이’와 같은 순 우리말 별명을 쓰고 있다고 했더니 멍한 표정들이었다. ‘놀수’는 아주 잘 노는 아이이고 ‘악보’는 소리(악)를 잘 지르는 아이이고 ‘퍼뜩이’는 말과 행동이 여느 사람들보다 빨라 그렇게 부른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순수한 우리말-토박이말-을 많이 잃어버렸다. 백(百)을 뜻하는 ‘온’이 사라졌으며 천(千)을 뜻하는 ‘즈믄’과 강(江)을 뜻하는 ‘가람’도 사라졌다. 한자어가 순수한 우리말을 몰아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영어와 일본어로 된 외래어가 순수한 우리말의 자리를 하나 둘씩 차지해 가고 있다. ‘세계화’ 등에 휩쓸려(?) 우리말이 설 자리를 점점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학생들의 이름에 ‘아름’, ‘가람’, ‘우리’, ‘초롱’ 등이 등장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나리’가 있고, ‘예쁜 하늘’을 줄인 ‘예하’라는 이름도 있다. 국어 시간만큼이라도 우리말 사랑주의(?)를 펼칠 거라고 다짐하면서 오늘도 교과 수업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