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柳僖)의 생애와 학문
정양완(鄭良婉) / 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유희의 생애
유희는 영조 계사(1773) 윤3월 이십칠일 해시에 용인 옛집에서 태어나, 헌종 정유(1837) 2월 초하루 용인 남악(南岳) 새집에서 돌아가니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陂)·남악(南岳) 그리고 방편자(方便子)라고도 하였다.
아버지 목천 현감 한규(漢奎)는 역산(曆算)·율려(律呂)에 조예가 깊은 큰 선비였고, 어머니 사주당 이씨 또한 친정에서부터 익힌 여러 경서를 바탕으로 의학 서적까지 섭렵하여 “태교신기”를 지을 만큼 큰 학자였으므로, 사우(師友)의 도움 없이 이미 집안의 내림만으로도 큰 학자가 나올 만한 터전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슬기롭고 지성스러운 태교에 의해 날 때부터 영특한 유희는 천하의 기재(奇才)라는 기림을 받을 만한 학식을 지녔고, 그 마음이 어질고 따듯하였다.
열 살에는 이미 “통감(通鑑)”을 다 꿰뚫어 알았고,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는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다. 열여덟에 감시(監試) 소과(小科)에 자작(自作) 발해(發解)하나, 과거 보기에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그 아들의 속마음을 아는 사주당 이씨는 아들이 명산에 집을 잡아 천진(天眞)을 지키며 천성대로 살기를 권고하여 그 뒤 20년간 과거장에 드나들질 않았다.
1809년 3월 상순에 산수가 아름답고 천재(天災)가 없는 단양(丹陽)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 1819년 가을에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것은 1825년이니 나이 쉰셋이었다. 어려서부터 놀이도 글로 할 정도로 그가 죽기까지 즐기고 반긴 것은 오직 책뿐이라, 마침내 “문통(文通)”에 총회된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몹쓸 사람의 모함을 받은 지 두어 차례였지만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한 적도 없었다. 광주 사는 사람이 “유 진사는 부처님 같습니다.” 하고 단양 농부가, “유 씨는 효성스럽고 높은 분입니다.” 할 정도의 인품이었다. 일을 할 때는 미리 아는 것이 많고, 농사를 지으면 남보다 수확이 많아서, 봉록을 받지 않고도 집안과 가족을 잘살게 하였다. 초취 전주 이씨에게는 무육, 재취 안동 권씨에게는 3남 1녀가 있고, 안동 권씨는 서파의 전기를 남겼다.
유희의 학문
석천(石泉) 신작(申綽)은 “태교신기” 서에서 서파(西陂) 선생은 나의 새 벗으로 그의 학문은 “춘추”에 특히 깊고, 음양·율려(律呂: 음악)·성력(星曆: 천문)·의학·수리(數理)의 서적에 관해 그 근원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였다. 조종진(趙琮鎭)도 ‘남악유진사묘지명’에서 “춘추”에 관한 서파 선생의 찬술이 거의 20권이 넘는다고 하였으며 서파 선생은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의무를 삼고, 정주학(程朱學)으로 근본을 삼아, 마음으로 연구하여 마음으로 지키어 잊지 않았다고 기렸다. 조종진은 또한 유희가 가난 속에 저술한 거의 100권이 넘는 책과 그의 어머니 “태교신기”를 자기가 써서 출판하지 못함을 못내 안타까워하였다.
“문통” 해제(1931. 1. 19. ∼ 5. 11. 그리고 7. 6.까지 18회 동아일보 연재, ‘조선고서 해제’, 제6회)에서 담원(정인보)은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근독(謹篤)의 공과, 그 효성을 청초(淸初) 이이곡(李二曲, )에 비겼고, 혜사기(惠士奇) 부자 대진(戴震)에 가깝다 하였다. 이어 ““언문지”·“물명류고(物名類攷)” 외에도…양전의(量田議)·율학류설(律學類說)·역상지(易象志) 등 여러 책은 다 문자로서만 운운하는 것이 아니오, 실(實)에 비추어 행할 수 있고 마칠 수 있고 추험(推驗)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직관표(職官表)의 초본이 있어 미완일망정 실정(實政)으로 실효(實效)를 꾀하려는 지사의 깊은 속마음이 보인다.”라고 하였다.
“재물보”를 엮은 이만영(李晩永 1748∼1817)도 60의 나이로 35세의 유희에게 고개 숙여 그 책의 잘못됨을 바로잡아 줄 것을 바랄 정도였으니 유희의 학문상의 높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담원문록” 권 4 ‘書才物譜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