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글쓰기

법원 판결문의 문장(9)

김광해(金光海) / 서울대학교

다음의 판결문을 먼저 한번 읽어 보자.

원래의 판결문

<대법원, 1998.11.13. 98두7343 판결>

[3] 일반적으로 행정상의 법률관계에 있어서 행정청의 행위에 대하여 신뢰보호의 원칙이 적용되기 위하여는, 첫째 행정청이 개인에 대하여 신뢰의 대상이 되는 공적인 견해표명을 하여야 하고, 둘째 행정청의 견해표명이 정당하다고 신뢰한 데에 대하여 그 개인에게 귀책사유가 없어야 하며, 셋째 그 개인이 그 견해표명을 신뢰하고 이에 어떠한 행위를 하였어야 하고, 넷째 행정청이 위 견해표명에 반하는 처분을 함으로써 그 견해표명을 신뢰한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는 결과가 초래되어야 하고, 어떠한 행정처분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할 때에는, 공익 또는 제3자의 정당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신뢰보호의 원칙에 반하는 행위로서 위법하게 된다고 할 것이므로, 행정처분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행정청이 앞서 표명한 공적인 견해에 반하는 행정처분을 함으로써 달성하려는 공익이 행정청의 공적 견해표명을 신뢰한 개인이 그 행정처분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이익의 침해를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경우에는 신뢰보호의 원칙을 들어 그 행정처분이 위법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필자는 이 암호같은 글의 진의를 파악해 내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을 소모하였다. 심지어 어떤 부분은 도저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해독 작업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우리가 해독해 낸 이 판결의 요지를 일상적인 말로 아주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행정 관청이라고 하더라도 한번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행정 관청이 그 약속을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당한 처분이라고 할 수 없다.”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문장이 아무리 특별한 양식이나 문체를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문장을 이렇게 작성한다면 그 내용을 곡진(曲盡)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이 문장이 보여 주고 있는 난맥상은 그런 특정한 양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은 수정을 해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뿐 아니라 수정할 내용 또한 심각하게 복잡하여 일일이 번호를 붙여 설명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가 난감한 글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부분 부분마다 지적하고 설명을 붙이던 종래의 방식을 피하고 몇 가지 두드러진 문제점들을 기술한 뒤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다시 쓴 결과만을 제시하기로 한다.

  문 제 점

‘행정상의 법률관계’ 같은 표현은 막연하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더 정확한 문장으로 바꿀 수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요건의 나열 부분도 모두 독립된 문장으로 하나하나 분리하여 처리하는 것이 간명하다.
일반적으로 행정 결정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하고자 할 때 행정청의 행위에 대하여 신뢰 보호의 원칙(아마도 ‘한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라는 뜻의 용어 같음-필자 주)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필요하다.
‘공적인 견해표명을 하여야 하고’ 같은 표현도 부정확하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뜻일 터이다.
첫째, 행정청이 개인에 대하여 신뢰의 대상이 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였어야 한다.
어순도 바꾸고 부분 부분을 정확하게 다듬어야 한다.
둘째, 행정청이 표명한 견해를 정당하다고 신뢰한 것과 관련하여 그 개인에게 귀책 사유가 없어야 한다.
지나친 축약이며 어순도 이상하다.
셋째, 그 개인은 그 표명된 견해를 신뢰하고 어떠한 행위를 하였어야 한다.
불필요한 구절이 들어 있어 중복이 심하다. 그리고 이 문장의 마지막 어미는 정말로 이상하다.
넷째, 행정청이 위에서 표명한 견해에 반하는 처분을 함으로써 그 견해 표명을 신뢰한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는 반드시 한번 끊어 주어야 한다. 앞에 나오는 네 가지 항목들을 왜 이어서 써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거니와, 이제 그 네 가지 항목이 다 끝나고 다른 논지가 이어지는데도 이를 왜 이어서 쓰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생각을 논리에 맞게 배열하는 순서에 이상이 있으며, 꼭 있어야 할 주어도 부당하게 생략되어 있다.
행정 처분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면, 그 견해 표명은 신뢰 보호의 원칙에 반하는 행위로서 부당한 것이다. 단, 이때 이 견해에 따른 개인의 행위가 공익이나 제3자의 (정당한) 이익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있어야 할 접속어가 누락되어 있으며, 긴 문장이 그야말로 두서(頭緖)가 없어 난맥(亂脈)을 이루고 있다. 글이 장황한 만큼 의미를 알 수 없는 부정확한 문장이 되었으며,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행정 처분이 이러한 신뢰 보호의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행정 처분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공익이 개인이 입는 손해보다 월등히 우선하는 성격의 것이라면, 신뢰 보호의 원칙을 들어 그 행정 처분이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문장에 두 번에 걸쳐 나오고 있는 ‘위법하다’(밑줄 부분)는' 단어는 이 판결의 내용으로 보아 ‘부당하다’는 단어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판결의 주요 내용이 특정한 실정법을 어긴 사항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신뢰 보호의 원칙’이라는 불문율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 말은 ‘위법하다’처럼 동사로 사용되지 않으며, ‘위법이다’, ‘위법이 아니다’처럼 명사로만 쓰인다.
   이번에도 우리는 판결문이 어려운 것은 법리(法理)가 어려워서가 아님을 확인하였다. 제대로 된 문장을 작성해 낼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면 법조계에서 요구하는 품위를 지키면서도 정확하고 세련된 문장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