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 움튼 때

- 卒業論文에서 『國語史槪說』까지

이기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이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니 불현듯 釜山에서 卒業論文을 쓰던 때의 일이 떠오른다.*) 나로서는 처음 쓴 논문이었다. 15·16세기 한글 문헌의 合用並書에 관한 것으로 제목은 「語頭 子音群에 대하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나는 李熙昇, 方鍾鉉, 李崇寧 세 분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국어의 역사적 연구를 새로운 기반 위에 건설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松島로 나가는 길목, 몇 십 길 낭떠러지 위의 조그만 판자집에서, 책상 대신 사과 궤짝을 놓고 앉아서,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노상 컬럭거리면서도, 이런 幻想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곁에는 책도 몇 권뿐이었다. 方鍾鉉 선생의 『古語材料辭典』(前集 1946, 後集 1947)과 G. J. Ramstedt외 『한국어 어원 연구』(Studies in Korean Etymology, Helsinki 1949)가 中世國語와 알타이諸語에 관한 내 지식의 主鑛泉이었으니 그 초라함은 이즈음의 젊은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Ramstedt의 책은 헬싱키 올림픽에 갔다온 李相佰 선생이 가져 온 것으로 東萊의 李崇寧 先生宅으로 여러 번 가서 抄錄한 것이었다. 그때에는 複寫機가 없었다.
  그때 내 옆에 놓여 있은 몇 안 되는 책 중에서 나비 學者 石宙明 선생의 『濟州道 方言集』(1947)을 나는 이상하리만큼 좋아하였다. 뒷날 내가 이 方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생각하면 무슨 因緣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方言集을 뒤적이다가 中世國語 語頭音이 合用竝書 'ᄠ', 'ᄧ'으로 표기된 단어들이 濟州道 方言에서 有氣音 'ㅌ', 'ㅊ'로 나타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對應 規則의 發見은 내 學問의 歷程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무렵 나는 釜山 거리의 한 古書店에서 불란서가 낳은 위대한 印歐語學者 A.Meillet의 名著 『歷史言語學의 比較方法』(La méthode comparative en linguistique historique, Oslo 1925)을 손에 넣어 탐독하던 중이었고 印歐諸語의 比較 硏究에 魅了되어 있었는데, 내가 이런 音韻 對應의 規則을 수립하게 될 줄이야. 내 졸업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나는 이 對應의 規則을 드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발견은 그 뒤의 내 학문에 한 準據가 되었다. 나는 표면의 사실들 밑에 깔려 있는 깊은 이치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학문의 참 보람이라는 생각을 줄곧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졸업 논문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너무 거창한 主題를 택하여 깨끗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많이 늘어놓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震檀學報』 17호(1955)에 실린 「語頭子音群의 生成 및 發達에 대하여」는 졸업 논문을 대폭 늘인 것이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더욱 많게 되었다.
  여기서 이 논문과 더불어 간행된 초기의 두 논문에 대하여 짧게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語辭의 分化에 나타나는 Ablaut的 現象에 대하여」(1954)는 母音이 조금 다른 단어들, 예를 들면, '다'와 '늙다'의 同源을 논한 것으로 그 기본 취지는 이해할 만한 것이었으나 音韻論的, 意味論的 基準을 세움에 문제가 있어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위의 논문에도 그런 혼란이 더러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뒤 이런 예들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나타남을 보고 自愧를 금할 수 없었다. 「雞林類事의 一考察」(1957)은 이 자료에 사용된 舌內入聲字들의 末音 'ㄹ'이 몇 단어에서 무시되어 온 例外性을 극복하려는 試圖였다. "恣意性을 法則性으로 代置"해 보려는 뜻은 좋았으나 그 과정에 억지 우김이 적지 않았다. 지금 나는 이 논문에서 논의된 일곱 단어 중에서 맨끝의 '箸曰折(七吉反)'은 '졀'로 읽음이 옳다고 믿고 있다. 이 두 논문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곤 한다.

2.

  1957년 3월에 나는 國語와 滿洲語의 比較를 다룬 논문(A Study on the Affinity of Manchu and Korean)으로 碩士 學位를 받았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은 만주어에 관한 지식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主題를 택한 것은 내가 만주어에 심취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비교 연구를 하고 싶은 들뜬 마음에서 겨우 조금 알게 된 만주어를 택했던 것이다.
이 논문을 英文으로 쓴 것은, 稚氣의 所致였지만, 그런대로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두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하다. 첫째는 수요클럽이다. 이 클럽은 수요일에 모임을 가졌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었는데(나중에 '修而悟'란 漢字를 붙이기도 했었다.) 그때 서울에 와서 우리나라 역사, 문학 등을 공부하고 있은 젊은 歐美 학자들과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임을 무은 것이었다. 韓國日報에 있으면서 코리아 타임즈를 맡고 있은 崔秉宇 씨가 發意하고 主導했었는데 거기에 내가 最年少者로 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임에서 崔秉宇 씨를 알게 된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분은 예사로운 新聞人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國際的 感覺과 우리나라 學問의 國際化에 관한 先見을 가지고 있었다. 장차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金門島에서 不歸의 客이 되고 만 것은 우리나라 言論界뿐 아니라 文化界, 學界를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분의 격려가 없었던들 영어로 논문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수요클럽에서 나는 미국의 E. W. Wagner 선생, 영국의 W. E. Skillend 선생과 사귀게 되었다. 두 분이 내 논문의 英文을 고쳐 준 일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수요클럽에 관해서는 Skillend 선생이 쓴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Choi Byung Woo, "Sponsor of Korean Studies." 「신문 기자 崔秉宇」 (寬勳클럽, 信永硏究基金, 1984).
  둘째, 그 당시 독일에 있은 O. Pritsak 선생과의 사귐이다. 알타이語學界에 관해서는 G. J. Ramstedt, N. Poppe 등의 몇몇 論著에 접하여 조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매우 구체적인 지식을 Pritsak 선생을 통해서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내 석사 논문의 어휘 비교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 선생이 관여하고 있은 잡지(Ural-Altaische Jahrbücher, Band 30, 1958)에 실린 것을 보면 처음부터 여기에 寄稿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논문을 쓴 1956년을 전후하여 나는 알타이語學에 푹 빠져 있었다. 국어의 모든 것을 알타이어학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다. 그러니 억지가 끼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한 예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은 몇 사람이 등사판으로 낸 『國語硏究』 2호(1957)에 실린 내 논문(「中世國語의-tuko에 대하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때마침 입수한 독일 학자 J. Benzing의 "Die tungusischen Sprachen"(Wiesbaden, 1955)에서 北方퉁구스 諸語의 奪格 接尾辭가 -duk, -dukkoj임을 보고 대뜸 中世國語의 '두고'와 비교한 것이었다. 척 보기에 그럴듯하였으나 同類의 '브터, 조쳐, 더브러' 등이 動詞의 活用形에서 기원한 사실과 아울러 생각할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후회하였고 곧 「十六世紀 國語의 硏究」에서 시정한 바 있다.
  이 무렵 내 관심은 中國 明代에 편찬된 『華夷譯語』에 쏠려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속에 국어와 女眞語에 관한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朝鮮館譯語』는 이상스럽게도 50年代에 우리 학계에서 일시 잊혀졌기 때문에 더욱 큰 호기심을 끌었었다. 위에 든 『震檀學報』의 논문에서도 두어 語項을 인용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까지 아직 논의되지 않았던 編纂年代의 推定을 중심으로 한 논문(1957)을 쓰게 되었다.
滿洲語에 대한 내 관심은 자연히 女眞語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고 여진어의 주된 자료인 『華夷譯語』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찍이 19세기말에 독일의 W. Grube가 소개한 『女眞譯語』 (Die Sprache und Schrift der Jučen. Leipzig 1896)와 日本의 石田幹之助가 소개한 「女眞譯語」(『女眞語 硏究의 新資料』, 桑原博士 還曆紀念 東洋史論叢, 東京 1930)가 알려져 있었는데, 前者는 오래 되었지만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검토된 일이 없었고 後者는 한 번도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된 일이 없었다. 이 두 자료에 대한 나의 집착은 이상하리만큼 컸다. 여러 달 동안 밤잠을 설치며 이 두 자료를 뒤적인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결과가 「中世女眞語 音韻論 硏究」였다. 우리 학계로서는 낯선 主題였는데, 아직 새파랗게 젊은 시간강사가 쓴, 200자 원고지 350장에 가까운 긴 논문이 『서울大學校 論文集 人文社會科學』(7輯 1958)에 실린 것은 異例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조금 앞서 함경도 지방의 女眞語 地名들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고(1958, 『國語語彙史 硏究』 所收) 未發表의 續編이 있음을 아울러 생각하면, 그 무렵에 내가 얼마나 여진어 연구에 푹 빠져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여기에 조금만 더 힘을 기울여 국제 학계에 발표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특히 石田의 資料에 관한 Daniel Kane의 연구(The Sino-Jurchen Vocabulary of the Bureau of Interpreters. Bloomington 1989)가 나왔을 때 그 參考文獻 目錄의 한 구석에 내 논문 이름이 있음을 보면서 새삼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3.

  아마도 내가 女眞語에서 손을 뗀 것은, 국어를 너무 오래 떠나 있은 데 대한 자책감도 있었지만, 그 무렵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一簑文庫의 정리가 끝나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方鍾鉉 선생의 逝去(1952년 11월 18일)는 내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선생님은 내 先親과는 어렸을 때의 친구였다. 先親의 뜻이 내가 국어를 연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선생님과 意氣相投하여 내 進學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나도 젊음의 허영에 조금은 들뜬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워낙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교육 탓인지, 자연스럽게 국어학을 택하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이 남기신 책들을 보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一簑文庫의 책들을 뒤적였는데 나는 그 古書들을 직접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학계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고 속의 16세기 자료를 중심으로 쓴 것이 「十六世紀 國語의 硏究」(1959)였다. 고려대학교에서 『文理論集』의 편집을 맡고 계신 具滋均 선생의 권유로 이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국어의 역사적 연구는 15세기 자료에 치우쳐 있었고 16세기 자료는 『訓蒙字會』 하나가 이용되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 15세기 국어의 연구만으로도 힘에 겨워 16세기에까지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내 논문은 이러한 偏向을 시정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넘어오는 변화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우리 학계의 시야를 넓히는 데도 한 보탬이 되었다. 이 논문은 1959년 6월에 탈고하였는데 11월에 一簑 선생님 七周忌 모임에서 그 내용을 간추려 발표한 뒤로, 그 무렵 古語辭典 간행을 준비하고 있은 南廣祐, 劉昌惇 두 분이 새 자료들의 추가를 서둘렀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 때 도서관 안팎에서 古書들을 뒤적인 경험은 내 학문의 길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救急簡易方에 대하여」(1959), 「소학언해에 대하여」(1960), 「龍飛御天歌 國文歌詞의 諸問題」(1962) 등을 쓰기도 했지만, 발표하지 않은 소득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4.

  『國語史槪說』 초판은 1961년 8월에 간행되었다. 이런 槪說書를 白面書生이 쓴다는 것은 도무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책은 民衆書館의 『國語國文學講座』 속에 포함되었는데 이 강좌를 주관한 金東旭 선생의 强勸을 끝내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갓 서른의 나이에 國語史의 體系化는 너무나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몇몇 언어의 역사를 읽어본 일이 있기는 했으나 國語史의 얼거리를 엮는 일은 거의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우선 時代區分이 문제였다. 「十六世紀 國語의 硏究」의 '結言'에서 토이기語史와 몽고語史에 있어서 C. Brockelmann과 N. Poppe의 時代區分을 소개하고, 中世 時期의 설정이 중요함을 말하면서 高麗 建國과 16세기말을 이 시기의 始點과 終點으로 삼는 새로운 提案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논문을 쓸 때에 이미 國語史 執筆을 앞두고 勞心焦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각 시기의 서술이 문제였다. 先史와 古代가 큰 어려움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先史는 어차피 간단히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으나 古代에 대해서는 三國의 言語 資料를 따로 나누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수박겉핥기를 하는 것만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검토에서 高句麗語, 百濟語, 新羅語의 實像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던 近代國語의 서술에서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때까지의 國語史 연구는 15·16세기에 머물러 있었고 17·18세기는 未開拓의 땅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1960년 늦봄에 『國語史槪說』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9월에 미국 하버드大學의 客員學者로 떠나게 되었는데 출판사의 사정으로 간행이 늦어져 이듬해 3월에 미국에서 준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늦은 것이 이 책을 위해서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미국에 가서 몇 달 동안에 얻은 새로운 知見을 준을 보면서 써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로 F. W. Cleaves, O. Pritsak, N. Poppe 세 분 선생과의 만남에서 얻은 것이었다.
  가을 학기에 나는 Cleaves 선생의 蒙古文語 강의, Pritsak 선생의 古代토이기語 강의를 들었다. 이 때에 비로소 蒙古文語와 中世蒙古語에 눈을 떴던 것이다. 蒙古文語의 轉寫를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도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이것이 前期 中世國語의 몽고어 차용어를 논한 부분(84~85면)의 補正에 큰 도움이 되었다. Pritsak 선생은 마침 그 해 1년간 客員敎授로 와서 그곳에서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한국어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동안 매주 요일을 정하여 선생은 퉁구스諸語, 나는 中世國語를 주고 받았다(이 일은 이듬해 여름 歸路에 내가 독일 함부르크에 갔을 때에도 이어졌다). Pritsak 선생으로부터는 旣成 學問을 비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N. Poppe 선생의 『알타이諸語 比較文法』(Vergleichende Grammatik der altaischen Sprachen. Teil 1:Vergleichende Lautlehre. Wiesbaden 1960)을 보면 이 책을 60년 10월 17일 받았다는 적발이 보인다. 나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알타이語學의 眞髓를 맛보았다. G. J. Ramstedt의 책을 보던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Poppe 선생은 워싱턴大學(시애틀)에 계셨는데, 마침 그 해에 컬럼비아大學에 교환교수로 와 계셔서 겨울 방학에 뉴욕으로 가서 선생님을 뵈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묵을 생각이었으나 선생님의 말씀이 한없이 길어져서 거의 한 달 가까이 묵게 되었다. 이 때에 알타이語學에 대한 내 갈증이 확 풀렸을 뿐 아니라 國語學者가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가끔 이 대학의 K. Menges(토이기語學) 선생도 합석하게 되면 두 분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때에 만나뵌 것이 기연이 되어 나는 몇 해 뒤 2년 동안(1965~67) 워싱턴대학에 가서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으나, 『國語史槪說』의 第2章(國語의 形成)과 第3章(古代國語 以前, 國語의 先史)은 준을 볼 때 가장 많은 加筆을 한 곳으로 거의 새로 版을 짜다시피 하였다.

5. 

  내 학문의 처음 몇 해 동안의 일을 적다 보니, 이런 것이 무슨 쓸모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찮은 글이나마 우리 학문의 한 시기에 관한 적바림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60年代 이후의 내 연구는 『國語史槪說』에서 가지를 친 것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쓴 것은 나 개인의 학문을 위해서 여간 유익한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高句麗語에 관한 내 연구는 이 책을 쓰면서 싹튼 생각들을 해를 두고 조금씩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러 해에 걸친 蒙古語 借用語에 관한 내 연구도 이 책에서 싹튼 것이었다. 내가 요즈음 내 학문의 마무름으로 하고 있는 語源 硏究도 이 책에서 싹튼 것이었다. 
  나는 얼마 전 몽고의 울란바토르에서 간행된 책 한 권을 받았다. 몽고 국립대학의 몽고학 연구소에서 낸 『몽고의 언어와 문자』라는 이름의 叢書 제1권으로 『몽고어의 역사에 관한 네 논문』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에 헝가리의 L. Ligeti, 불란서의 P. Pelliot, 일본의 服部四郞의 논문과 함께 中世國語 속의 몽고어 차용어에 관한 내 최초의 논문(Mongolian Loan-words in Middle Korean, 1964)이 실려 있었다. 1992년에 간행되었는데 우편 착오로 늦게야 받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받아들고 나는 잠시 50年代와 60年代의 일들을 회상하며 깊은 감회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