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한국어

이종숙 미국 프린스턴 트랜턴 한국학교 교장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사태는 여기 미국 교포들의 한국어 생활 속에서 이제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어 적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뉴욕에 갔다 오면서 기차를 탔을 때의 얘기다. 자리를 잡고 보니 맞은편 좌석에 한국 아이로 보이는 대여섯 살쯤의 어린 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인 듯한 젊은 부인이 앉아 있었다. 내가 말을 걸었다.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국말을 모르는가 싶어 얼른 영어로 고쳐 물었다. 그랬더니 숫기 없는 작은 목소리로
  “…Jenny”
  라고 했다. 나는 다시 몇 살이냐고 물어 봤다.
  “Five and half years old.”
  좀 큰 소리로 말하면서 이내 고운 눈매에 웃음이 묻어 났다. 이제 나하고 친해지려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참인데,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던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제니야, 한글로 말해야지.”
  나는 여기서 기찻간에서의 뒷 이야기를 더 늘어 놓아야 할지 어쩔지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얘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제니 엄마는 내가 먼저 기차를 내리게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정말 나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가 어느 한글학교의 한글 선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초면인 내게 우리 2세들의 한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한글 과목(?)이니 한글학교(?)니 하는 단어들을 아주 입에 익은 말로 쉴 새 없이 꺼내 썼다. 그의 한국어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으므로 나는 그의 마음을 다칠까봐 아주 조심했다. 그 뒤로 나는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던 ‘제니야, 한글로 말해야지’ 때문에 얼마 동안 가슴이 답답했었다.
  나는 한국학교 교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마다 한글은 글자이지 말이 아니라고, 또 한글은 한국어와 동의어가 아니라고 목청을 높여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누구의 말마따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날이 갈수록 ‘한글로 말했는데도 못 알아 듣느냐’고 호통을 치는 연수회장에서의 기체조(氣體操) 교사에, ‘한글을 전혀 못하는 학생을 맡았다’고 걱정하는 선생에, ‘댁에서 자녀들과는 꼭 한글을 써 주세요’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는 한국어 교사 얘기까지 나돌고 있는 오늘의 사태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어찌 그뿐이겠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어느 신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이야기 대회의 광고문이다.

○○지구 한인 중고등학생
한글(이야기) 발표 경시대회
○○한글학교 공동주최로 아래와 같이 한인중고등학생
한글(이야기) 발표회를 갖고자 하오니 많은 학생들이 참석하도록
한글학교 선생님 및 학부모께서는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가 기준 : 

  1. 한글의 정확한 발음(50%)
  2. 여러 사람 앞에서의 한글을 사용한
    자기 의사 전달 능력(25%)
  3. 이야기 내용의 풍부성(한국인 2세 및
    한국 문화의 배경의 자랑스러움을
    나타내는 정도)(25%)


  ‘한글(이야기) 발표’라는 제목 그대로를 읽는다면, 혹 한글로 쓰는 글짓기 대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글의 정확한 발음’이니, ‘한글을 사용한 자기 의사 전달 능력’이니 한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이야기 대회 개최에 대한 안내 광고문임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야기는 누구나 말로 한다. ‘한글’에 대한 풀이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한국의 고유한 문자, 이조 제4대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국자로서 발표된 것으로, 처음에는 28자였으나 지금은 24자만이 쓰임<국어대사전>

  24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 글자의 이름<금성판 국어대사전>

  이라고 되어 있듯이,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문자의 이름일 뿐이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광고문을 쓴 사람은 한글이 말인 한국어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용감하게도 이런 광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째서 한글을 한국어로 혼동하는 위와 같은 사태를 가져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매학기 초마다 교포 신문에는 수많은 한국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가 실리고 있다.

- 시 간:오전 9시~정오(매 토요일)
대 상:유치원~8학년
교육 과목:한글·한국 역사 및 문화·예절·음악·미술·체육·영어·수학 및 SAT
등 록 금 : 170불(둘째 20%, 셋째 100% 할인)

- 수업 내용:한글, 한국 역사 및 문화, 음악, 미술, 태권도, 체육
수업 시간:매주 토요일 9시 30분~12시 30분(15주간)


- 수업 일시:매 토요일 오전9시~12시까지
대 상:유치부~12학년
학 과 목:한글, 역사, 미술, 음악, 한문, 태권도

- 교과 내용:한국어, 한국 역사, 음악 이론, 동요, 가곡, 고전무용, 현대무용, 태권도, 서예, 동양화, 영어, 수학
학급 편성:충분한 학급 시설과 교사진을 갖추고 유치반 및 학년별로 5개의 반과, 한글을 전혀 못하는 학생과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학생을 위해 2개의 특수반을 운용하고 있으며,

- 대 상:유아(4살 이상), 국민학교 1학교~중학교 3학년
교육 내용:한국어, 우리 역사와 문화, 음악, 미술, 태권도, 각종 활동
교통 제공:학교 버스 운영(교통비 별도)

  위에서 본 것처럼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의 이름이 ‘한국어’가 아닌 ‘한글’로 되어 있는 학교의 수가 태반이다. 더 친절을 베푼 어떤 학교는 ‘한글(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이라고 해 놓고도 있다. 흔히 언어의 네 가지 기능을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한글 읽기나 한글 쓰기야 가능하겠지만 한글 듣기나 한글 말하기가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어떻게 네댓 시간이면 다 익히게 되는 한글이 학과목의 명칭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 한국학교에서 모집하는 대상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교포 자녀들이다. 그들은 영어권에 살면서 한국말을 몰라서 주말에 한국말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한국학교이다. 그렇다면 과목 명칭이 ‘한글’이 아닌 ‘한국어’이어야 하는 것은 여기서 얼마나 타당한가.
  이렇듯 한국학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교과목의 이름을 ‘한글’로 광고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과 한국어를 동의어로 잘못 알게 되는 소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내 지나친 단정일까. 이러한 혼동은 ‘한글 Ⅰ, Ⅱ, Ⅲ…’, ‘한글 첫걸음(책 이름)’이라는 교과서 이름들과 또 ‘한글교육’, ‘한글학교’, ‘한글학자’, ‘한글선생’, ‘한글시간’ 같은 말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내었다. 심지어 서울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식자층의 박사님도 ‘워싱톤에서 W대학의 한글 교수를 만날 것이라’느니, ‘한글 교육에 봉사하는 한글 학교의 한글 선생님 여러분!’하고 강연장에서 기막힌 서두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비단 미국 교포들만의 사태가 아닌 듯싶다.
  다음은 ‘한글학교’라는 명칭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학교의 명칭은 한글학교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다음으로는 ‘한국학교’, 그리고 더러는 ‘한국어학교’ 또는 ‘한인학교’라고 칭하고 있다.
  우리는 한때 나라를 잃었던 슬픈 역사 속에서, 한글이라는 단어가 나라나 겨레나 독립이라는 의미로 대치된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문맹자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곧 나라 사랑의 길이었기 때문에, 밤이면 골방의 등잔불 밑에서 또는 마을의 공회당이나 예배당에 숨어서 야학으로 한글을 가르쳤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당시의 그들은 누구나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지금 여기 2세들처럼 일부러 한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 단지 한글 문맹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한국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면서 다만 글자를 모르는 것뿐이었으므로 한글만을 가르치는 곳을 가리켜 한글학교라고 칭한 것은 아주 정확하고도 적합한 명칭이었다. 오늘까지도 교회에 부설되는 한국학교의 이름들이 널리 한글학교로 애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어, 한국 문학, 한국 철학, 한국 정치, 한국 경제, 한국 음악, 한국 미술, 한국 무용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을 한국학(Korean Studies)이라고 한다. 한국학교의 교과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한국어, 한국 역사와 문화, 붓글씨와 사군자, 한국 춤, 한국 노래, 태권도 등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좀 생각해 보자. 과연 한글학교라는 명칭으로 이런 내용을 다 싸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고향 집 대청 마루의 뒤주 위에 크기 순서대로 얹히던 백자 항아리들처럼 한글보다 큰 그릇이 한국어요, 한국어보다 큰 그릇이 한국이지 않은가. 한국학교라는 넉넉한 이름으로야 얼마든지 많은 내용물을 집어 넣을 수 있지 한글학교라는 명칭으로는 그럴 수가 없게 된다.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돋아 나는 한국학교들이 ‘무슨무슨 한글학교’라고 이름을 지어 신문에 학교 광고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한글을 한국말로 혼동하는 사태를 빚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교포 사회 속에서 한글로 된 신문의 광고 효과란 대단하다.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너나없이 신문에 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쓰다 그만 입에 붙어버려 지금 이렇게 한글학교라는 명칭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여기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 교육부이다. 영사관의 교육원을 통해 각 한국학교로 배달되는 공문들은 하나같이 ‘한글학교’로 되어 있다. 교육부가 미주 안에서 한국학교라고 지칭하는 학교는 단지 우리 한국학교1) 와 남가주 한국학교2) 둘뿐이고 나머지 한국학교들은 한글학교로 통칭하고 있다. 이것이 한글과 한국어의 혼동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하여 그것이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던 것은 지난 여름 LA에서 있었던 제3회 국제 한국학 학술대회에서였다. ‘해외 한민족과 차세대’라는 주제하에서 ‘다원 시대의 교육 이념’에 관한 발표와 토의가 있었는데, 마침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참석자들이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한글학교의 명칭을 한국학교로 바꾸어 달라는 의견을 교육부에 전달하도록 결정하였다.3)
  해외에서의 한국어 교육에는 두 가지의 어려운 점이 있다. 하나는 한국어 교사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가 가르칠 제대로 된 교과서 얻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한국어 교사는 한국어 전공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더러는 교사들의 수준 문제를 얘기하기도 하지만, 요즈음 학교별, 지역별 교사 연수회
와 협의회 차원의 학술발표회4) 를 통하여 지금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또 그들이 힘들게 뿌려 놓은 이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작년부터 한국어가 미국의 아홉 번째의 공식 외국어로 채택이 되어 오는 11월 7일이면 두 번째의 SAT Ⅱ 한국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음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학교에서는 교육부에서 펴낸 교재들을 사용하고 있다.5) 그런데 문제는 그 교과서들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오류가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그러니 전문가가 아닌 한국어 교사들로는 그 오류 그대로를 가르칠 수도 있게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명성 있는 학자의 필자명에 사계의 권위자들인 심의위원들의 이름자가 나열된 교과서와 교사 지침서들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본국에서 쓰고 있는 한국어 교과서에서는 이런 오류들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교재라고 하여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내던져 버린 듯한, 당국의 무책임에 놀라움과 섭섭함을 금할 수 없다.6) 이것이 바로 본국의 해외 동포 교육의 단면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씁쓸하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어찌 교재 만드는 이 일 하나뿐이랴. 지금 우리에게는 어디에서나 자기 책임을 다하는 반듯하고도 정성스러운 마음이 빠져 있다. 그 대신으로 들어 앉은 것이 ‘아무렇게나’이다. 아무렇게나 생각없이 한글이라는 단어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나, 아무렇게나 책을, 그것도 2세를 위한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이나가 다 맥을 같이 하는 오늘의 우리들의 얘기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할머니 또 어머니들이 제삿날 저녁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다식을 박던 일이나, 한 올씩 떠서 버선볼을 감치던 일이나, 하다 못해 봄이면 장독대 언저리에 맨드라미 씨앗을 뿌리는 작은 일에도 온 정성을 다하던 그 귀한 마음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