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민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교수
(가) 진달내 (民謠詩)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寧邊엔 藥山 그 진달내을 한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길 발거름마다 려노흔 그을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開闢│(25호, 1922.7), PP.146-147. (나) 진달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내 아름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시집 『진달내』 (매문사, 1925), PP. 190-191. |
앞의 인용 작품을 보면, 김소월이 『개벽』지에 발표했던 (가)를 시집
『진달내』에 (나)와 같이 수록하면서 각 연의 구성과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각 연과 행의 구성에 일정한 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시적 형태의 고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복되는 율조의 규칙에 따라 어휘를 바꾸고, 음수를 맞추기 위해 관형사나 조사를 생략하며, 어감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어휘를 골라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3연의 변화이다. 첫 행에서는 '길'이 나오고, '발거름마다'라는 어구를 쓰고 있다. 이것은 '가시는 걸음걸음'으로 모두 고쳐진다. 제2행에서는 '려노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2연의 제3행에서 쓰인 '리우리다'와 어휘가 중복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노힌그츨'로 고쳤다. 그리고 제3행에서 '고히나'라는 부사를 '삽분히'로 바꾸고, '즈러밟고'는 '즈려밟고'로 고쳐 썼다.
그런데 김소월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스승인 안서 김억이 엮는 시집
『소월시초(素月詩抄)』에서는 이 작품의 일부 표기법을 바꾸고 띄어쓰기를 아래와 같이 고쳤다. 특히 제3연의 경우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진달래꽃」의 형태가 바로 김억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달래꽃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분히 지레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억 편, 『소월시초』 PP. 77-78. |
그런데 바로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김소월이 쓴 '즈려밟고'와 김억이 고쳐놓은 '지레 밟고' 가운데 어느 것을 정본의 표기로 택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소월이 쓰고 있는 '즈려밟고'라는 말은 앞서 예시한 것처럼, 최초에는 '즈러밟고'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밝혀 줄 수 있는 용례를 김소월의 시 가운데에서는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김억은 그의 시 「눈」(시집 『해파리의 노래』 22면)에서 '지러밟으면'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만일 '즈러', '즈려', '지러'가 모두 같은 뜻을 가지는 말이라면 표기의 통일이 필요하며, 그 의미도 분명하게 규정해 두어야 한다. 일반 사전에 이 단어가 제대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국어학자이면서 바로 평북 정주 태생이기도 한 이기문 교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즈려>는 지금까지 그 해석이 상당히 문제가 되어 온 것으로 안다. 적어도 서울말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 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平北辭典』에 <지리디디다>(발밑에 든 물건이 움직이거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짓눌러 디디다)가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볼 때, <즈려밟고>와 그 위에 있는 <삽분히> 사이에 의미상의 어긋남이 생기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풀밭을 걸어갈 때, 아무리 가만히 밟아도, 풀이 발 밑에서 쓰러진다. 이렇게 힘을 준 것과 동일한 결과가 될 때, 역시 <지리밟다>를 쓰는 것은 정주 방언에서는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위의 시에서는 <꽃>을 밟는 동작인데, 이 경우는 아무리 사뿐히 한다 해도 잔혹한 결과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삽분히 즈려밟고>란 표현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 이기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심상』, 1982. 12.) |
이러한 해석에 따라,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진달래꽃」의 '즈려밟고'라는 말은 '힘주어 밟고'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모두 이 해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즈려밟고'라는 동사와 이를 한정하고 있는 '사뿐히'라는 부사가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이다. '사뿐히 힘주어 밟고'라는 해석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승훈 교수는 이것을 소월의 역설적인 언어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를 납득하기 어렵다.
나는 이같은 부자연스런 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지레 밟고'라는 김억의 표기를 정본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평안도 방언이 아니라 표준어에서 흔히 많이 쓰는 '지레'라는 부사를 김소월이 평안도 방언의 발음대로 표기했던 것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지레'라는 말은 '어떤 시기가 되기 전에 미리'라는 뜻을 갖는다. 예를 들면, '지레 오다(미리 먼저 오다)'라든지, '지레 짐작하다' 또는 '지레채다(미리 알아채다)'에서처럼 뒤의 말과 어울려 쓰인다. 명사와 결합하여 복합 명사를 이루는 예로는 '지레김치(보통 김장 김치보다 일찍이 담가먹는 김치)', '지레뜸(밥에 뜸이 들기 전에 푸는 일. 또는 그 밥)' 등이 있다. 이런 식으로라면, 김소월의 시에서 '지레 밟고'는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뜻을 전체 시의 내용과 결부시키면 그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설정되어 있는 시적 정황은 '나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임'과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는 나' 사이의 내면 공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떠나가는 임에 대한 원망 대신에, 오히려 자신의 변함이 없는 사랑을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자기 사랑의 표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은 '진달래꽃'이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것이 진달래꽃이기 때문에, 진달래꽃은 한국인들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그 느낌도 자연스럽다. 이 시의 표현대로 '영변의 약산'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은 바로 우리네의 곁에 있으며, 일상의 체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같은 체험의 진실성에 근거하여 자기 정서를 표현하고, 그 표현에서 새로운 시적 감응력을 끌어내고자 한다.
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진달래꽃은 이 시에서 더 이상 평범한 자연물이 아니다. '영변의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은 이제 영변 약산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아름다운 사랑의 의미로 채색되어 시에 등장한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분홍빛의 사랑으로 시적 의미를 내면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한 아름의 진달래꽃은 사랑의 크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서 슬픔의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떠나는 임 앞에서 진달래꽃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황적 아이러니에 해당된다. 이 시에서 이별의 슬픔이 내면화하고 그 대신에 사랑의 진실이 자리잡게 되는 것은 이러한 시적 형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별의 순간에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확인법은 소월이 만든 정조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길 위에 뿌려 놓은 그 진달래꽃을 다른 사람이 밟기 전에 임이 지레(먼저) 밟고 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임이 떠나갈 길 위에 뿌려져 사랑의 충만을 드러내던 진달래꽃에 또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순결성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진달래꽃은 순결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별의 순간에 임 앞에 진달래꽃을 뿌리며 자기 사랑을 보여주고, 다시 자신의 순결한 사랑 모두를 바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정조는 이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그려놓고 있는 이별의 순간은 슬픔의 장면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해야 하는 때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사랑의 깊이와 진정성을 보여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임에게 바칠 수 있는 황홀의 순간이다. 이별을 눈물의 언어 대신에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꾸밀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정적 자아는 그러므로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이자. 김억의 시 「눈」에 나오는 '지러밟으면'의 경우도 '지레밟으면'의 방언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뜻도 '하얀 눈을 힘주어 밟으면'이 아니라,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먼저 밟으면'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