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로 / 한글학회 이사
Ⅰ. 사전 편찬실의 부활
1942년은 침략의 원흉 일본이 최후 발악을 시작하던 때라 자기네 침략 행위의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어떠한 방법도 가리지 않고 못된 짓을 감행할 때에 걸려 든 것이 조선어학회 수난이었다. 이 혹독한 행위는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끝이 났다.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이윤재·한징 두 어른이 희생당하고 그 이외의 선배 여러분은 혹은 감옥에서 실형을 치르고 어느 분은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당하여 숨어 지내던 분들이 광복과 함께 다시 모이어 우리말 되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었다.
그때 조선어학회(현재의 한글학회) 사전 편찬실에서 석인 정태진 선생을 모시고 사전을 편찬하던 시기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반세기 50여 년이 지났으니 강산이 다섯 번 이상 바뀌었을 것이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0여 년 전의 일을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가며 쓰자니 잊혀진 일,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일 들이 서로 뒤얽히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 겁도 나고 감개도 새삼 깊다.
내가 석인 선생을 편찬실에서 모시고 편찬 일을 함께 한 것이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초순쯤이라고 기억된다.
그 때 내 나이 스물 여덟. 석인 선생께서는 마흔에 귀가 달린 40대 후반일 것으로 기억된다. 8·15에 광복이 되고, 화동의 구 회관에서 청진동 현재 고려화재보험 자리로 옮긴 것이 9월 1일, 한글학회에서는 그 2층을 전부 사용하였다. 편찬실에는 건재 정인승 선생이 사전 편찬 위원장이시고, 이극로, 정태진, 김병제, 이중화, 한갑수, 권승욱, 김원표, 안석제, 최창식, 이강로 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오직 한갑수님과 나만이 남아 있다. 나는 막내둥이로 끝자리를 더럽히었다.
석인 선생께서는 해방 전부터 사전 일에 간여하시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시대에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시고 겨우 풀려나시어 해방이 되자 다시 사전 편찬의 일을 맡으시게 되었다. 석인 선생은 건재 정인승, 격암(格岩) 박희성 선생과 함께 그때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를 1925년에 졸업한 막상막하의 수재들로서, 이 세 어른이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세 분 스승께 삼가 명복을 빈다.
석인 선생께서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시어 미국 대학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 철학을 전공하시고 돌아오시어 평생을 한글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종사하시다가 돌아가신 거룩하고 깨끗한 선비이시다. 해방 직후 미국 군정 시대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활개를 칠 때에, 그 유창한 영어 실력과 모든 분야에 걸쳐 깊이를 모를 정도의 학식을 겸비한 석인 선생께 요직에 모시겠다는 여러 번의 권유를 모두 물리치시었다. 그리고 어렵고 따분한 사전 편찬의 일을 천직으로 아시고 일생을 바치신 인간 석인 선생의 거룩하고 깨끗하고 꿋꿋한 나라 사랑의 정신에는 머리가 저절로 숙어진다. 그때 편찬실에서 있던 몇 가지 일을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몇 마디 적기로 한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따분하고 복잡하고 어렵고 그러면서도 그 결과에 대하여 칭찬보다도 비난이 앞서는 직업은 사전 편찬일 것이다. 편하고 멋지고 호화롭고… 이러한 일을 모두 물리치고 초라한 편찬실에서 인절미 몇 덩어리로 점심을 때우면서 한 손에 인절미를 들고 한 손으로 사전 원고를 응시하던 그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눈에 선하다.
Ⅱ. 어휘의 수집 과정
사전 편찬의 일은 대체로 네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어휘의 수집
둘째, 수집된 어휘의 정리
셋째, 올림말의 선택과 그 서로의 관계
넷째, 뜻풀이
이 4개 과정은 하나도 쉬운 일은 없다. 우선 어휘 수집만도 여러 각도에서 정세한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편찬실에서의 석인 선생은 건재 정인승 선생과 함께 하나하나의 어휘를 새로운 언어학적 안목으로 그 가로 세로의 관계를 중심으로 올림말이 될 수 있는 낱말을 심사 결정하는 일이었다. 범위를 좁히어 검다[黑]를 기준으로 그 처리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으뜸말로서 ‘검다’라는 어휘가 있다. 이 뜻은 숯이나 먹의 빛깔을 나타낸다. 그 쓰임으로는
삼단 같은 검은 머리 |
이 ‘검은 검고 검던’의 쓰임으로 보아 이 말이 으뜸말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ㅓ’와 ‘ㅏ’의 홀소리 대립에서 ‘감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검다’와 같은 자격으로 같은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삼단 같은 감은 머리 |
이 ‘감은 감고 감던’의 세 낱말은 홀소리의 ‘ㅓ’와 ‘ㅏ’의 대립에서 ‘ㅏ’가 이끄는 낱말로서 ‘검다’에 대하여 범위로는 작고 느낌으로는 밝은 느낌을 주는데 그 쓰임이 과연 ‘검다’와 같은 보편성 통용성이 있을까? 아무래도 백 퍼센트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각도를 달리하여 닿소리의 예삿소리와 된소리의 위치에서 검토한다.
삼단 같은 껌은 머리 |
이 말은 닿소리의 ‘ㄱ’과 ‘ㄲ’의 대립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뜻은 ‘검다’ 보다 그 느낌의 폭이 좀 세고 짙은데, 쓰임은 ‘검다’보다 약간 뒤지는 듯하다. 이럴 경우에 석인 선생께서는 이런 것의 쓰임을 폭 넓게 조사하여 올림말로서의 자격을 판정한다.
현재는 수십 종류의 국어사전이 간행되어 있으나 그 때에는 참고할 수 있는 국어사전은 일제 때에 총독부 중추원에서 발간한 ‘조선어 사전‘ 정도이다. 모든 것은 그때의 편찬자의 노력과 안목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아무개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수십 종의 국어사전이 있으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사전은 큰사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큰사전이 우리 나라 모든 사전의 모태가 되는 것은 그때에 발간된 6권짜리 큰사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으뜸말 ‘검다’로 눈을 돌려보자. ‘검다’를 으뜸말로 감다, 껌다, 깜다 들의 이차적인 으뜸말이 형성되었는데, 다시 여기에 뒷가지 -엏-, -앟-이 일률적으로 붙어서
거멓다 꺼멓다 가맣다 까맣다 |
등의 네 개 낱말이 생겨났다. 이 때에는 형식적으로 -엏-와 -앟-가 붙었는데, 이 형태소들이 덧들어감으로써 의미상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조사하여야 한다. 이것은 뜻풀이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이 밖에
검엏다 껌엏다 감앟다 깜앟다 |
들과 같이 맞춤법 문제를 검토하여야 한다. 앞엣것은 어원(語源)을 밝혀 적은 것이고 뒤엣것은 어원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맞춤법에서 ‘으뜸말에 [ㅡ]나 [ㅣ]가 붙으면 밝혀 적고, 그 이외의 요소가 붙으면 밝혀 적지 아니한다’의 조항을 적용하여 밝혀 적지 아니하므로 거멓다…들로 적게 된 것이다.
결정하여야 할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단계 복잡한 형태로 이어진다. ‘가맣다, 거멓다, 까맣다, 꺼멓다’에는 그 말 위에 다시 ‘새-’ ‘시-’들과 같은 앞가지가 붙어서
새- 새까맣다 새카맣다 |
와 같은 낱말이 생긴다. 이 새-, 시-는 ‘가맣다’, ‘거멓다’에는 붙지 않고 된소리 ‘까맣다’나 ‘꺼멓다’에 붙으면서 으뜸말에 없던 ‘카맣다’, ‘커멓다’와 같은 말이 곁가지로서 생겨난다. 석인 선생께서는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단계적으로 파생하는 낱말들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하나하나를 카드에 기록하여 이것들과 씨름을 하신다. 이 과정에서 이 [새-] [시-]는 빛깔을 나타내는 다른 낱말에도 규칙적으로 붙는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곧
새파랗다 시퍼렇다 새하얗다 시허옇다 |
이러한 말들을 음운론의 측면에서 앞가지와 으뜸말 사이의 소리를 관찰하기로 하자. 곧 그 발음이 ‘새노랗다’인지 샌노랗다 또는 시누렇다, 신누렇다 인지 면밀히 관찰하여 이 문제를 표준말과 비표준어 또는 맞춤법의 규칙 적용들로 끌고 가서 형식적인 면의 정리가 끝나면 다시 뜻풀이로 방향을 돌린다. 이런 일과가 날마다 되풀이된다.
정말 따분하고 고단하고 지루하다. 그러나 본인은 이것이 재미있고 흥미있게 생각하신 것 같다.
Ⅲ. 인천에서 있었던 일
그때의 사전 편찬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가장 보람있고 꼭 해야만 할 한국 문화의 주춧돌이 되는 뜻있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나라 잃는 민족이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이 불순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하여 없는 일을 만들고, 사전 가운데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조선(朝鮮) 따위 낱말들의 뜻풀이에 반일 정신을 고취하였다 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어 여기에 종사하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가고 50여 권이 넘는 원고는 증거물로 압수하여 함흥 감옥으로 가져갔었다.
그러는 중 회원의 간부들이 일제의 논고에 불복하여 서울고등법원에 상고하는 바람에 사전 원고는 다시 서울로 이송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여 이 수난의 원고를 대한통운의 창고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일까지 있었다.
이런 거룩한 민족적 사업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독지가는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고, 학회가 자리잡고 있던 회관까지 친일파에게 빼앗기어 회관을 다시 얻느라 애를 먹은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1948년에 미국 록펠러 재단에서 사전 편찬 보조금으로 4만 5천 달러의 거액이 지원되었는데, 이 돈으로 미국에서 사전 용지, 잉크, 표지에 쓸 천들을 구득하여 플라잉 애로(flying arrow)라는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하였다.
어학회에서는 이 원조 물자를 인수하기 위하여 사람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영어를 잘 하는 석인 선생이 내려가기로 결정되고 그 수행원으로 편찬실의 막내둥이인 내가 모시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회를 대표하여 파견되실 석인 선생의 행색이 걸작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에 몇 십 년을 쓴 중절모자의 앞 부분이 펑크가 나서 구멍이 뽕 뚫어졌는데 이것을 태연히 쓰시고 두툼한 두루마기에 뒤축이 물러앉은 헌 구두를 신으시었다. 여불없는 시골 두메의 촌티가 줄줄 흐르는 농군이었다.
이 어른을 누가 당시에 우리 나라에 흔하지 않은 미국 유학생, 그것도 미국 명문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십 년 가까이 교육 철학을 전공한 일류 지식인인 줄 알 수 있겠는가? 모시고 가는 나는 그래도 양복 차림이었으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사실 그때 나는 좀 불안하였다. 그때 인천 부두의 막되어 먹은 분위기에 이런 촌어른을 모시고 가서 제대로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인천의 항만청(港灣廳)에 가서 온 용무를 말하니 담당 미군을 찾아가라는 것이고, 저런 촌양반이 가서는 면회도 못할 것이니 일류 통역을 동반하라는 것인데, 그 통역이란 위인이 하우스 보이 출신으로 상스러운 영어나 겨우 지껄일 줄 아는 정도이었다. 이 통역을 정중히 사절하고 미군을 찾아갔다. 만나는 미군이 처음에는 인천 부둣가에서 막일하는 노동자인 줄만 알았던 모양인데 석인 선생과의 대화 몇 마디에 눈이 휘둥글하게 되는 꼴을 보니 한편 우습기도 하고 석인 선생의 고매한 인격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인수한 물자를 화차에 옮겨 싣고 나니 화차 열두 대에 꽉꽉 찼었다. 이때에 그 많은 물자보다도 석인 선생의 인품에는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감격을 받았다. 그때에 실지로 겪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해방 뒤에 우리 나라에는 종이가 없어서 선화지라는 누런 종이에 인쇄하는 것이 상례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보내온 사전 용지는 그때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깨끗하고 두꺼운 모조지였다. 이것을 화차에 싣는 첫날부터 웬 사나이가 화차 곁을 떠나지 않고 종일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수상쩍게 생각하고 감시를 하고 있는데, 사흘 되던 날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좀 만나자는 것이다. 나는 만날 일이 없다고 거절하자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자 하고 이 종이가 어디에 쓸 종이냐고 묻기에 사전 만들 종이라 하였더니 이 사나이가 나에게 바짝 다가와서 돈은 자기가 얼마든지 댈 터이니 동업하자는 것이다.
나는 사전(辭典)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을 상대편에서는 사전(私錢) 즉 위조 지폐로 알고 이 좋은 종이로 위조 지폐를 만들어서 한목 톡톡히 챙기자는 의도였던 모양이다. 우습고 기가 막히어 호통을 쳐서 쫓아 보내었는데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편찬실의 화제가 되었었다.
Ⅳ. 잊히지 않는 이런 일 저런 일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사전 편찬에 필요한 경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므로 사회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편찬 기일을 앞당기기로 하여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강행군이 시작되었는데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어휘의 수집이었다.
우리 나라는 오랜 동안 유교 사상에 물들어서 실생활이나 각 전문 분야 농업 용어, 동식물 용어, 건축 용어, 각종 기구 기계의 이름 들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이었다. 따라서 이 방면의 용어나 그 주석에는 많은 애로가 있었다. 가령 목 앞에 불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영어로는 아담스 애플(Adams apple)이라 한다는 것을 석인 선생께서 일러주시었다. 우리말로는 이름이 무엇인지를 모두 몰랐다. 분명 이름이 있을 터인데 이것을 모르니 이 어휘는 우리 문화 유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 말이 누락되었는데 ‘이내골’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수정판에서 울대뼈를 표준어로 ‘이내골’을 비표준어로 처리하였다.
방언에 대하여는 더욱 캄캄이었다. 나는 시골 태생이라 충청도 방언은 어느 정도 짐작한다. 충청남도 일부 방언에는 ‘잔대’라는 식물이 있다. 마치 도라지처럼 생겼는데 봄철에 그 뿌리를 캐어 날로 먹기도 한다. 이 식물을 올림말에 올리고 주석을 서두르다가 이 식물에 대하여 각 편찬원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고 어느 편찬원이 ‘딱쥐’일 것이라고 한다. 딱쥐는 내가 모르고 잔대는 상대편에서 모르고 석인 선생도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산에 가서 ‘잔대’를 캐다가 실물을 보인 후에야 전라도 전주 근처에서는 ‘잔대’를 ‘딱쥐’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처리하였다. 이런 일은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났다.
석인 선생은 말이 적고, 모든 일을 자신이 판단하여 몸소 실천하는 장자지풍을 가진 어른이다. 그러므로 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언어학에 대하여서도 풍부한 학식을 겸비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어 중심의 사전을 만들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옛말 연구에 몰두하시었다.
현재말은 옛말에서 흘러 내려온 것인 만큼 현대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옛말 연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론에 입각하여 옛말 자료에서 옛말을 수집하는 한편 공시적으로는 한 시기의 말이 지방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중시하여 방언 채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낮에는 사전 편찬, 밤에는 고어와 방언의 연구를 병행하여 해방된 지 3년이 되는 1948년 12월에 ꡔ朝鮮古語方言辭典ꡕ을 간행하였다. 이 방면에 대하여 고어 방언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그때에 이미 이런 사전을 출판한 놀라운 저력을 과시하시었다.
이 어른의 고어 및 방언에 대한 언어관은 철저하였다. 다만 이 분야는 나의 집필 분야가 아니기에 생략한다.
Ⅴ. 어휘의 사전적 처리
선생의 사전 편찬의 자세는 진실하면서도 정세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검다’, ‘껌다’의 문제에서 그의 학구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었기에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여 그의 사전 편찬의 일면을 살피기로 한다.
‘검다’라는 낱말에 뒷가지 -앟-, -엏- 들이 붙어 ‘거멓다’, ‘가맣다’가 되고 다시 이 말의 앞에 새-, 시- 들이 붙어 새로운 말로 발전하고, 이리하여 이 형태의 낱말은 일단 마무리지어졌으나 그 아래에 또 다른 계통의 뒷가지가 이어지면서 폭 넓은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중복되지 않고 누락되지 않게 사전에 수록하려면 다시 정연한 논리와 단계적인 정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선 으뜸말 감- 아래에 [-아-]가 붙어 [가마-]가 된 다음에 다시 여기에 다른 낱말이 붙어 합성어가 형성된다. 이 파생하는 방법이 아주 규칙적이다.
가마말쑥하다 가마무트름하다 |
일단 이런 말이 생기면 이와 대립되는 말을 찾아내어 이것을 실지에 쓰임과 대조하여야 한다. 홀소리의 바뀜에서 이 말의 큰말이 형성된다 .여기에도 -아-, -어-의 대립을 고려하여야 한다. 곧 ‘가마-’에 대한 ‘거머-’이다.
거머멀쑥하다 거머무트름하다 |
와 같이 정리된다. 이 말은 다시 닿소리의 [ㄱ]와 [ㄲ]의 대립에서 예삿말 센말 관계로 발전하여
가마 → 까마 |
로 발전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사전에 누락되면 그 사전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사전에는 큰말의 ‘거머무트륵하다’는 있는데 이에 대립되는 작은말 ‘가마무트륵하다’는 빠졌다. 정세한 논리적인 판단이 없으면 이런 불완전한 처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휘 분석 작업은 그 어휘로서는 더 이상 문제 삼을 것이 없음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된다. 석인 선생과 같이 박학하면서도 정세하고 참을성이 센 사람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으뜸말 ‘검다’의 줄기 아래에 다시 뒷가지들이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밝은 홀소리 어두운 홀소리 구별없이 [ㅜ]가 이어져 ‘거무-’, ‘꺼무-’, ‘가무-’, ‘까무-’와 같은 말뿌리가 형성된 다음에 다른 요소가 이어진다. 앞의 네 형태 중 [거무-]만을 보기로 제시하여 어휘 형성 과정을 보인다.
거무끄름하다 |
거무데데하다 |
거무뎅뎅하다 |
거무레-하다 |
거무스룸하다 |
거무숙숙하다 |
거무스럼하다 |
거무스레하다 |
거무스름하다 |
거무숙하다 |
거무접접하다 |
거무죽죽하다 |
거무죽하다 |
거무축축하다 |
거무충충하다 |
거무칙칙하다 |
거무테테하다 |
거무튀튀하다 |
거무트름하다 |
거무티티하다 |
거무틱틱하다 |
‘검-’에 ‘-우-’가 붙고 다시 그 아래에 또다른 형태소가 이어져 성립된 어휘수가 21개이다. 이와 같은 발전 과정은 ‘껌+우’, ‘감+우’, ‘깜+우’에도 똑같이 규칙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대립으로 이루어진 말 중 사전 처리 작업에서 어느 하나만 빠뜨려도 불완전하다는 지적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형식면으로 본 분석 종합의 과정이 끝나면 다음 단계에는 뜻풀이의 작업이다.
Ⅵ. 뜻풀이의 실제
어휘의 수집과 정리가 끝나면 사전 처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뜻풀이 작업이 시작된다. 말의 최소 단위인 형태소는 음소(phoneme)와 의미(meaning)로 이루어진다. 앞의 어휘 분석 작업은 어떠한 으뜸 형태소에 다른 형태가 붙어서 사전 처리의 최소 단위인 낱말을 그 형식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낱말이 담고 있는 뜻을 풀이할 계제이다. 이 작업이 사전의 진정한 목적이자 바로 생명이다.
이 뜻풀이 작업을 앞에서 제시한 ‘검다’를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검다’는 두 형태소로 이루어졌는데, ‘검-’은 어휘적 의미를 나타내고 ‘-다’는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므로 뜻풀이는 의미를 나타내는 ‘검-’만이 대상이 된다. 이 뜻풀이 작업에는 영어와 한문과 일본말 들에 두루 능통한 석인 선생의 실력이 많이 작용하였으니 외국의 사전들을 참고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 큰사전> 한글학회 지음’을 대상으로 ‘검다’의 처리 실제를 살피기로 한다.
검다 |
① 숯이나 먹의 빛깔과 같다. |
우선 뜻풀이의 방법은 뜻풀이의 대상이 되는 말을 쓰지 않고 다른 말로 바꾸어서 그 대상이 되는 말의 뜻을 알기 쉽게 나타내야 한다. ③의 뜻풀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바나 마음가짐이 엉큼한 사람을 ‘속이 검은 사람’들과 같이 표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으뜸말의 뜻풀이가 이루어지면, 으뜸말에서 번진 파생어는 비교적 쉽다. 가령 ‘검다’에 [-엏-]이 덧붙어서 ‘거멓다’가 되었다면 ‘형태소=음소+의미’인 만큼 [-엏-]라는 형태가 본디 가지고 있는 뜻만 꼭집어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인 ‘검다’에 -엏-가 붙어 ‘거멓다’가 되었는데 ‘거멓다’의 뜻풀이를 살펴보면
거멓다 |
①②③ 연하게 검다.
결국 형식면에서의 [-멓-]이 본디 가지고 있는 뜻이 ‘연하게’이다. 다시 ‘거무칙칙하다’에서 뜻풀이의 본보기를 보도록 하자.
거무칙칙하다 흉해 보이도록 곳곳이 어둡고 짙은 빛을 띠고 검다.
이 말은
으뜸말: |
검다 |
형태소: |
-우칙칙하- |
뜻: |
흉해 보이도록 곳곳이 어둡고 짙은 빛을 띤 |
이 될 것이다. 석인 선생께서는 갖추신 모든 학문과 지식을 나라 사랑 정신에 응집시키어 사전에 쏟아 부은 것이다.
Ⅶ. 마무리
해방 직후의 그 어수선한 시국에 학회 편찬실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석인 선생께서는 교원들을 연수시키는 강사로 출강하여야 하고 각 지방의 국어 강의 요청에 응하여야 하며 문교부에서 위촉한 교재 편찬에 협조하는 한편 사전 편찬을 서둘러야 하는 이중 삼중의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석인 선생께서는 국어에 관한 일은 어떠한 일도 사양하지 않으시었으니 이것은 곧 국어를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입으로 나라 사랑을 외치고 겨레 사랑을 호소하는 정치가나 독립 운동가보다도 몇 십배 나라 사랑, 겨레 사랑, 문화 사랑과 통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바쁜 중에 점심 시간까지도 쪼개어 가며 사전 편찬에 열중하시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친근하고 소중하고 널리 쓰이는 ‘어머니’란 낱말에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적절한 뜻풀이가 생각나지 않아 석인 선생께 여쭈었더니 ‘어머니 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등과 같은 친족 용어를 영어 사전에서 번역하여 하나하나 적절히 지도하여 주시었다. ‘어머니’의 뜻풀이에 애를 먹다가 ‘나를 낳은 여성’이라는 간단하고도 분명한 뜻풀이를 해 주신 일은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에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이 제가 지은 죄에 겁이 나서 자기 소유의 집을 회관으로 제공하겠다는 제의가 있었다. 이중 청진동 지금의 고려생명의 건물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수락하여 그 해 9월 1일에 청진동 회관으로 이사하였다. 그 뒤에 그 친일파가 회관을 임시 쓰라고 한 것 뿐이지 소유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회수하는 바람에 한글학회에서는 3년 동안을 승강이하다가 그 집에서 쫓겨나서 할 수 없이 명동 근처(정확한 주소는 생각나지 않음)로 이사하여 6월 20일에야 이사를 끝내고 이삿짐을 풀지도 못한 채 사전 편찬의 일을 강행하였다. 이것은 그 해 10월 9일 한글날까지는 사전을 출간해야 한다는 사회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돌아가신 건재 정인승 선생을 비롯하여 석인 선생, 동운 이중화 선생들이 밤 9시까지 비상 근무를 하였다.
6월 25일에 난리가 났다고 세상이 발끈 뒤집히었다. 그런 어수선한 판국에서도 학회 편찬실에서는 사전 편찬에 열을 올리고 어휘 하나의 처리 여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때 가장 의젓하게 평시와 다름 없이 사전 일을 계속하는 석인 선생의 모습은 세속을 초월한 성인처럼 우러러 보이었다.
드디어 6월 27일 총성은 더욱 가까이 들리고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육박하였다는 급보가 뻔질나게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늦출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저녁을 때우고 다시 편찬실에서 일을 계속하였다. 그때 석인 선생과 정인승 선생, 나 이 세 사람이 국어사전 넷째 권을 보았는데 ‘이살부리다, 야살부리다’가 대립어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토론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난리의 진행이 심상치 않다고 직감되어 내일 결정하기로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런데 그날 새벽 28일에 한강 철교가 끊어지고 서울이 북괴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뒤로 뿔뿔이 헤어져서 생사존망을 모르다가 건재 선생 이하 몇 사람은 다시 만나 사전 일을 계속하였으나 한국 고제에 능통하셨던 동운 이중화 선생은 납치되었다 돌아가시고 석인 선생도 27일 저녁에 헤어진 것이 마지막 영이별이었다. 이 어른의 돌아가심은 한글학회의 손실에 그치지 않고 온 겨레의 손실이었다. 이리하여 나와 석인 선생은 악마같은 6·25난리로 영영 끊어졌다.
지하에 계신 영령께 무한한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