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호 /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는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을 점령하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았고, 한국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고 하였다.
곧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한국 사람에게 일본말만 쓰게 하고, 한국 말을 못 쓰게 하였다. 한국 민족을 일본 사람으로 동화시켜, 이 지구상에서 한국1)
민족을 아예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석인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말을 지켜서 민족을 살리고 나아가서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한 ‘한글 운동’을 벌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밤낮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과 ‘한글 운동’을 벌이다가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거짓으로 짜맞춘 조선어학회 사건의 첫 희생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3년 동안 경찰서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가 석방되었다. 석방된 지 3개월 만인 8·15에 천인공노하여서인지 일본제국은 망하고, 이 땅에서 쫓겨갔다.
이에 빼앗기었던 나라를 다시 찾아 세우고, 잃었던 우리의 말글도 찾아 다시 쓰게 되었다. 석인 선생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우리의 말글에 “제이의 인생”을 바치었다. 자기 한 사람의 영달은 물론하고 여러 가족들의 행복마저 버리고, “제이의 인생”을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과 문맹자 퇴치와 국어 교사 양성 등의 ‘한글 운동’에 바쳤다.
끝내는 “제이의 인생“인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2. <큰사전> 편찬원 석인 선생
2.1. 우국 동지 정인승을 만남
석인 선생은 1921년 3월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5월에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이라 함) 문과에 입학하였다. 석인은 같은 반 학생인 건재 정인승을 만났다. 건재도 일본 제국주의 통치자들이 없애 버리려는 우리의 말글을 끝까지 지키려는 강한 애국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조선 독립의 날’이 하루 빨리 찾아오게 하자고 굳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5년 3월에 둘은 같이 “연전”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결심한 의지를 살리기 위하여 건재 정인승 선생은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가고, 석인 선생은 함남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영생여”라고 함) 교사로 갔다.
2.2. “영생여”2)
에서의 교사 생활
석인 선생은 “영생여”에서 2년 동안 순진한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중학교의 지리시간에나 듣던 북쪽의 추운 함흥3)
이었지만, 부임하고 보니 함흥이란 고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 때의 함흥시 인구는 16만 2천4)
으로 관북 지방 제1의 신도시로서 시민들의 삶의 의지가 굳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듣던 바대로 모두 애국자로 보여 매우 만족하였다.
석인 선생은 순박한 여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더 키워주기 위하여 시간시간마다 나라 안팎의 명작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명시와 명시조들은 골라서 깊이 감상케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일본말 교육을 더 강요하고 있었으나, 석인 선생은 한글의 뛰어남과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조선 문학의 우수성을 성의를 다하여 가르쳤다. “영생여”에서의 2년 동안의 교사 생활은 자신과 가정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학생들을 위하여 생활하였다. 저녁에 하숙으로 돌아오면, 의례이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우리말의 옛말과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 정리를 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잠에 들기 전에 자신의 미숙함에 대하여서도 생각하여 보았다. 하나둘씩 떠올랐다. “아직 미숙한 네가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할 수 있느냐?”라고 자책도 해보았다.
그러하던 어느날 “연전”를 졸업할 때에 미국 유학을 권하던 빌링스5)
선교사로부터 세 번째의 미국 유학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았다.
2.3. 미국 유학 후의 “영생여” 교사 생활
석인 선생은 자신의 인격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빌링스 선교사가 권유하는 대로 미국 유학6)
을 하였다. 만 5년 동안 어느 하루도 집안 생각이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루라도 평안히 모셔야 할 부모님과 묵묵히 남편을 섬기던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까지 떼어놓고,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학과 교육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1931년에 돌아왔다.
5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일본 사람들이 조선 땅의 양지는 다 차지하고 있었고, 친일파가 아닌 조선 사람들은 모두 음지로 쫓겨나서, 기아에서 신음하다 못해 만주로 연해주로 정처없이 이민을 가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제국은 조선 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켜, 넓고 기름진 만주 땅을 송두리째 삼켜 버리려고 위세 당당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일본 제국에 대하여 조선 안의 지식인들은 사상적 반일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고, 나라 밖의 만주 땅에서는 피 끓는 젊은이들이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하며, 조선 독립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전전긍긍하며, 조선 안에 있는 조선 민족주의 단체들과 지식인들을 엄히 단속하고 있었다. 여기에 석인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또 한번 하였다. 석인 선생은 이 백성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와 여러 중학교에서 교사로 모시려고 하지만, 얼마 가르치지 못하고 떠났던 “영생여”로 복직하였다. 부모님과 처자들이 반대함에도 굴복하지 않고 함흥으로 다시 내려갔다.
3.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모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조선 통치도 말기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에 오직 하나만 남은 조선 최고 지식인들(민족 지도자들)의 단체인 조선어학회를 때려부수려고 음모을 꾸미게 되었다.
석인 선생이 그 첫번째 희생자로 1942년 9월 5일에 걸려 들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3.1. 사건의 발단7)
;열차 안에서 여학생이 쓴 조선말8)
1942년의 여름 방학을 한 날이다. 함흥 “영생여”도 방학을 하였다.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은 책보따리를 한아름씩 안고 교문을 나섰다. 많은 학생들이 ‘함흥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에 올라탔다. 그 가운데 세 학생은 ‘회령’9)
으로 북상하는 기차칸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 학생들은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지내게 된 것을 생각하니 마냥 기쁘기만 하였다. 깔깔 웃어대며 저마다 여름 방학 동안의 생활 계획을 발표하며 떠들어댔다.
기차는 ‘함흥 정거장’을 떠나서 여섯 정거장을 지났다. 앞으로 ‘전진10)
정거장’ 하나만 지나면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홍원11)
정거장’이다.
바로 이 때에 옆자리에 앉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홍원경찰서’의 형사부장 야스다12)
라는 놈이 여학생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이!(‘얘들아’를 낮춰 부르는 일본말. ‘나쁜 자식들’과 같은 말) 나졔(어찌하여)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고, 조선말을 쓰는가? 국어를 상용해” 그 때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우리 민족에게 “국어를 상용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언제 어디에서나 국어(일본말)를 반드시 쓰도록 했다. 일본말을 쓰지 않는 이에게는 심지어 기차표 한 장도 팔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말을 쓰는 이를 반제국주의자나, 조선 독립 운동가요, 민족주의 사상가로 몰아 무거운 형벌을 주며 못살게 굴었다.
그 때의 학생들은 어디에서나 국어(일본어)를 써야 함을 알고도 조선어를 쓰고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본의 조선 통치자들이 국어(일본어) 생활의 강요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반사적으로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조선 사람끼리 조선말을 썼기로서니, 그것이 뭐가 나빠요?”하고, 한 학생이 대들었다. 야스다 형사는 기차가 ‘전진 정거장’에 도착하자 여학생들을 기차에서 끌어내려 역장실로 끌고가서 문초를 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반항하는 학생 박영희의 집(홍원)을 찾아가서 집안 수색을 하였다. 박영희의 묵은 일기장 한 권을 압수해 갔다.13)
개만 못한 야스다 형사는 여학생의 일기장에 묘한 흥미를 느끼고 읽으려고 압수하였던 것이다.
무슨 냄새라도 맡듯이 코를 너불거리며 읽어가던 야스다는 “오늘 국어를 한 마디 하였다가 선생님한데 꾸지람을 받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였다.14)
야스다란 놈은 “국어(일본어)를 썼는데, 어찌하여 칭찬은 받지 못하고, 오히려 꾸지람을 받았을까?”하는 의심을 품었다. 이 의심이 꼬투리가 되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작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3.2. 국어(일본어)를 쓴 것을 꾸짖은 교사 석인
야스다 형사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였다. 그리하여 영어를 가르치던 석인 선생이 꾸지람을 한 선생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영생여” 학생들이 남달리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것도 석인 선생의 영향임도 알아냈다. 사실은 석인 선생은 수업 시간마다 기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너희들끼리는 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라고 일러 주었다. 간간이 문학 작품을 소개하여 조선말 글의 우수함을 깨우치게 할 뿐 아니라, 간추린 조선 역사를 들려 주어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석인 선생은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을 잘 배우는 것도 고마웠지만, 어린 학생들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에 더 고맙게 여겼다.
한편 여학생들을 취조한 야스다는 여학생들의 억지 자백에 따라, “조선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사상교육과 일본제국에 반항하는 교육”을 시킨 석인 선생을 잡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석인 선생은 1년 전에 “영생여”를 떠나고 함흥에는 없었다.
석인 선생은 “연전” 재학 시절에 사상적으로 뜻이 맞았던 건재 정인승 선생이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으로 이 지구상에서 조선말이 없어져 가고 있음이 안타까워서 ‘고창 고보’ 교사직도 내던지고, 조선어학회에 와서 봉사하고 있는 중인데, 같이 조선어학회에서 일을 하자.“고 간청하므로, 1940년 봄방학에 사직서를 내고 “영생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의 조선어학회로서는 하루 빨리 <조선말 큰사전>을 편찬 발간하기로 하고 업무를 서두르고 있었다. 침략자들이 조선말 글을 아주 못 쓰게 하기 전에 <조선말 큰사전>을 만들어 내기로 계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에 조선의 유지 108명의 발기로 발족한 ‘조선어 사전 편찬회’15)
가 꾸준히 써 온 <큰사전> 원고를 가지고. 사전 편찬을 서두르고 있었다.
1940년부터 사전 편찬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언젠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발작하여, 조선말을 못 쓰게 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생각하고 편찬을 서두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이 지구상에서 조선말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조선말이 사전에 남아 있는 한, 언젠가는 조선이 국권을 회복하는 그 날에는 조선말도 반드시 함께 되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석인 선생은 한 달도 안 되어 봄방학을 마친 “영생여” 학생들의 성화에 못견디어 다시 학교로 돌아가 교단에 섰다.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학교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일제의 손이 조선어학회에 미치기 전에, <조선말 큰사전>을 내놓아야 하므로, “얼마 동안은 인재 교육도 포기하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학교를 다시 사직하고, 이듬해(1941년) 봄에 서울로 올라와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을 다시 하게 되었다. 석인 선생은 자기로 말미암아 <큰사전> 편찬이 늦어졌다고 생각하고 아예 이불을 싸들고 집에서 나왔다. 회관에서 건재 선생과 함께 손수 밥을 지어가며 밤낮없이 <큰사전> 편찬에 매달렸다. 이렇게 하기를 1년 6개월만인 1942년 3월에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여섯 권 중)의 원고가 인쇄소로 넘겨 인쇄에 부쳐졌다.
3.3. 조선어학회를 때려잡은 일제의 음모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조선 안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조선 민족 단체인 조선어학회를 때려잡아 없앨 구실을 찾다가 그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함흥 “영생여” 학생들의 “조선말 사용 사건”’의 주동자16)
로 조선어학회의 정태진을 잡아들이고, 조선어학회를 단방에 때려잡아 없앨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1942년 9월 5일부터 조선어학회를 때려잡는 행동을 개시하였다. 석인 선생을 1942년 9월 5일에 “영생여” 학생들의 ‘조선말 사용 사건’의 증인으로 홍원경찰서로 불러들였다. 홍원경찰서는 불려 온 석인 선생에게 다짜고짜로 수갑을 채우며 “너를 증인으로 불렀으나, 너는 증인이 아니야! 바로 네가 사건의 중심 인물이야, 어이(임마) 알았소이까?”하며, 증인으로 부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철창 속으로 밀어 넣고는 ‘조선말 사용 사건’으로 걸려든, 곧 일기장의 주인 박영희는 그 자리에서 불러내어 석방하였다.
한편 함경남도와 경기도 두 경찰국의 민완 형사들을 서울로 보내어 종로구 화동의 조선어학회 회관을 덮쳤다. 밤 새워 <큰사전> 편찬을 하다가 막 새벽잠이 든 학회 대표 이극로 간사장과 정인승, 권승욱 등의 편찬원을 체포장 한 장 없이 묶어 끌어내고, 여기저기에서 새벽 기습 작전하여 붙잡은 조선어학회의 중심 회원 11명과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차압한 사전의 원고와 회계 장부와 회의록, 후원자 명부 등 온갖 문부를 같은 차에 싣고, 석인 선생이 갇혀 있는 홍원경찰서로 가서 가두었다.17)
이 날이 바로 1942년 10월 1일이다.
이 날은 일제가 조선을 삼키고, 서울 한복판에다가 ‘조선총독부’라는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 기관을 세우고, 조선을 식민지 통치한 지 33년이 되는 기념일18)
이다. 일제는 바로 이 날을 조선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민족운동 단체인 조선어학회를 때려잡는 날로 삼았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3·1운동’ 후에는 ‘제2의 3·1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선 반도를 발판으로 삼고 만주 땅을 송두리째 집어먹은 ‘만주 사변’ 이후부터 생트집을 잡아 중국 대륙도 삼켜버린 ‘중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세계에 일본 제국주의자의 침략 야욕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쟁과 침략을 싫어하는 조선 사람들이 ‘3·1운동’과 같은 민족 운동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1938년에 이르러서는 조선 학생에게 가르치는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고, 1940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창씨령」을 공포하여 조선 사람들의 ‘성’을 야만 일본인의 ‘성’으로 바꾸게 하고, 1941년 3월에 들어서는 해괴망측한 「조선 사상범 예비 구속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거나, 일제의 침략을 비판할 것으로 생각되는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을 예비로 검거하는, 곧 미리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두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선어로 된 ꡔ조선일보ꡕ·ꡔ동아일보ꡕ를 비롯하여 모든 신문과 잡지는 죄다 폐간시키고, 동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어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전쟁을 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은 일본 군대로, 여자 청년들과 소녀들까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어다가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시키는 등 천인공노할 짓들을 내놓고 버젓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가서 세계 지배의 야욕까지 품고, 최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야욕을 안 조선어학회는 한 시라도 빨리 <큰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이었던 것이다.
3.4. 조작된 자백서에 따라 회원 총검거 19)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 홍원경찰서는 ‘홍원’으로 끌고 온 석인 선생 등 11명의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도 피의자라고 딱지를 붙이고, 알몸으로 뉘어놓고 살갗이 찢겨나가도록 대나무몽둥이로 매질하는 이른바 “육상 전쟁”과 피의자들을 뉘어서 나무의자에 묶은 다음에, 숨이 끊어질 때까지 코에 고춧물을 부어넣는 이른바 “해상 전쟁”과 피의자들의 발목을 묶고 천정에 거꾸로 매달거나, 두 팔을 뒤로 젖혀서 허리에 묶고 팔과 허리 사이에 가로 지른 목총 양 끝에 맨 줄을 천정에 걸어 매다는 이른바 “공중 전쟁”이라는 극악한 고문으로20)
“조선어학회는 상해의 조선 임시 정부에 자금을 마련하여 보내는 비밀 독립 운동 단체이다.”라고, 일본 경찰이 작성한 허위 자백서에 손도장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백서를 가지고 조선어학회의 남은 주요 회원을 차례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모두 33 사람21)
에 이르렀다. 이들을 날마다 아침 저녁 두 차례씩 감방에서 경찰 무술연습장으로 끌어내어, 회원들 사이의 우정을 끊기 위한 고문도 하였다.
또 지식인들로서의 수치심을 갖게 하려고, 서로 마주선 동지의 얼굴 반쪽에다가 먹물로 먹칠하게 하거나 회원들의 등에다가 “나는 거짓말쟁이다. 너를 극도로 미워한다.”라는 일본말을 먹물로 쓰게 한 다음에, 장내를 한 바퀴씩 번갈아 돌아오게 하였다. 그때 돌지 않고 있던 회원은 한 바퀴를 돌고 오는 회원의 뺨을 한 대씩 때리고 정강이도 한 번씩 발로 걷어차게 하였다. 이 때에 뺨을 얻어맞거나 정강이를 발로 채일 때는 반드시 “나는 황국 신민(일본 천왕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뺨을 맞는다.”라는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만일 마주한 이를 가만히 때리거나, 뺨 맞는 이가 구호를 작게 지를 때에는 두 사람 똑같이 다섯 대씩의 몽둥이로 맞는 벌을 가했다. 그리하여 항상 매맞는 회원이 “한 방에 넘어지도록 때려라”고 미리 주문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은 아무리 왜놈들에게 혹독한 매를 맞을지언정 “우리는 동지의 뺨을 칠 수 없다”고 고집하다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3.5. 아버님의 부음 듣고 시 지어 바침
1942년 9월 5일에, “홍원에 내려갔다가 곧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는 아들의 인사 말을 들은 지가 어제와 같은데, 증인으로 불려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9월 15일에 난데없이 왜놈 형사대가 달려들었다. “요보 상22)
은 사상범의 아버지야! 알았어”하고, 석인 선생의 아버님을 윽박지르며 가택 수색을 하였다. 책이란 책은 죄다 가져가면서 “요보의 남편은 언제 석방될지 몰라. 살아서 오면 다행이야, 하나님께 잘 빌어 봐”라는 말 한 마디를 석인 선생의 아내에게 내던지고 갔다. 이 때에 비로서 아버님께서 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자로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병없이 건강하시던 어르신이 아들의 구속 소식을 들은 순간 제자리에 주저앉은 뒤부터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였다. 며칠 후 “홍원경찰서는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곳이라”는 소문마저 듣고는 4개월 동안 아들의 편지 한 장 받아 보지 못하고 1943년 1월 30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석인 선생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입대하는 아들에게 특별 허가된 면회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16살 때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학생(남편: 그때 경기고보 학생)과 결혼한 후 10년 동안을 시부모 모시고 공부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연전과 미국 유학 때)만 하던 아내마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석인 선생은 이러한 집안 소식을 들었으나, 아무 말 못 하고 고문에 상한 얼굴에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을 곁에 두고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아내, 그런데도 또 교편을 잡으러 함경남도 함흥으로 내려갔던 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10년 만에 모처럼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원을 자원하여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던 아내의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이렇게 지난 날들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슬프고 분한 마음을 조금 가라 앉히었다. 그리고는 감방을 돌아서 나가려는 아들에게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정도를 걸어야 된다.”23)
하고, 힘주어 일렀다. 그리고 아들이 간 다음 얼마 뒤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한시 한 수를 지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으나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맏아들로서의 죄를 다음 같은 시로서 사죄하였다.
「홍원에서」 |
(원문) 洪原에서 |
해 두고 헛 읽으나 이룬 일 무어런고! 이룬 일 전혀 없고 죄만 가볍지 않네, 이팔의 배달 남아 원한이 크고 큰데, 무심한 저 하늘은 소리조차 없구나. 망국한 섧다커늘 아비 또한 돌아가니, 망망한 하늘 아래 내 어디로 가잔말고! 한 조각 외로운 혼이 죽쟎고 남아 있어,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 가네. |
積年虛構事何成 事意不成罪不輕 二八男兒含冤大 蒼天在上自無聲 國破父亡事事非 天涯無際我何歸 一片孤魂今猶在 夢裡向南夜夜飛 |
이 한시의 원문24)
은 칠언율시이다. 첫 연에서 “남아에게 품었던 원한은 커져만 가는데”라고 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옥중에 갇힌 자신은 크게 이룬 일 없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참혹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심정을 통곡하듯 읊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는 구구절절이 나라 잃은 한과 아들의 구속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고, 또 자기로 말미암아 한글 동지들이 모진 고문을 치르다가 죽어나가시는 이윤재· 한징 두 동지를 바라보고, 너무도 참을 수 없는 망국의 한을 읊고 있다.
3.6. 이윤재와 한징 두 회원 옥중 순국25)
악독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은 홍원경찰서에서 만 1년 동안에 지옥에서와 같은 고역을 치른 회원은 33명에 이르렀다. 증인으로 불려 와서 조사받은 회원도 48명에 이른다.
“조선 독립을 목적한 내란 음모죄”란 죄이름26)
으로 33명의 회원이 1943년 10월 3일에 함흥지방법원에 기소되어 홍원경찰서에서 함흥감옥소로 이감되었다. 함흥감옥소에는 두만강 넘어 만주로 드나들며 독립 운동하다가 붙들린 애국자가 1,000여 명이나 갇혀 있었다. 그 1,000여 명 모두가 왜놈들에게서 극악한 고문을 받고 죽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애국자가 네다섯 사람씩 죽어서 나가고 있었다.27)
그 가운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갇힌 이윤재28)
와 한징29)
선생이 “한글을 사랑하고 지키다가 나라 없는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석인 선생에게서 이 때처럼 마음 아프고 슬펐던 일이 없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왜놈의 계략에 따라 된 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지만, 석인 선생은 자기로 말미암아 두 동지가 순국하였으니 마음이 더욱 아팠었다.
3.7. 문화적 독립 운동한 죄로 실형 언도
홍원경찰서는 1943년 10월 3일에 사건 조작을 시작한 지 1년이 넘도록 취조와 고문으로 세월을 보냈다. 1943년 10월 3일에야 함흥지방법원으로 사건을 넘겼다. 함흥지방법원은 ‘예심 판결’에서 19명의 한글 동지에게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옥에서 석방시켰다. 그리고 남은 14명의 한글 동지에게는 유죄의 혐의가 있다고 하며 정식 재판에 회부하였다.30)
그후 함흥지방법원은 몇 차례의 재판을 거듭한 끝에, 곧 1945년 1월 16일에,
“이들은 어문을 통한 민족 고유의 어문을 정리, 통일, 보급이란 이름으로 20여 년 동안 문화적 민족 운동을 하였고,…… 오로지 민족의 아성을 쌓아놓았다.”31) |
라고, 최종 유죄 판결하고, 석인 선생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 5명의 한글 동지에게 2년에서 6년의 징역형을 내리고, 장지영·이중화·이우식·김양수·장현식·김도연·이 인·정열모·김법린 등 9명의 한글 동지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내렸다. 그리하여 집행유예를 받은 9명의 한글 동지는 3년 만에 풀려 나오고,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 4명의 한글 동지는 서울고등법원에 바로 상고하였다. 실형 언도를 받은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네 동지는 생각해 오던 것보다 형량이 너무 많고, 또 아무리 나라 없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쓰는 어미말을 연구한 것이 죄가 될 까닭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주장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상고하였다. 한편 상고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서울고등법원에 계류되면, 두 동지가 죽어 나간 함흥감옥소, 그리고 하루에도 한두 사람씩의 애국 동포들이 죽어 나가는 지긋지긋한 함흥감옥에서 서울고등법원이 있는 서울감옥소로 피의자인 자기들이 이송되기 때문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석인 선생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석인 선생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상고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상고할 수 없었다. 또 자기로 말미암아 순국한 두 동지와 피의자로 끌려 와서 죽을 고생들을 한 한글 동지들에 대한 속죄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상고를 포기하고, 언도된 실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서울고등법원에 상고한 건은 5개월이 지나가도록 “서울로 간다 못간다”하는 소리 없이 함흥지방법원에 그대로 묵혀 있었다. 겨우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상소자들은 서울고등법원이 보낸 “조선어학회 사건의 공소 서류를 접수하였다.”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접수가 그렇게 오래 걸리니, 또 공판은 몇 달 걸려야 끝나지! 여기서 더 시달리게 되면, 우리들은 모두 함흥감옥소 귀신들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하면서 상고 접수 통지서를 받은 상고자들은 절망에 빠져 한탄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라는 소식이 감옥 안에 들려왔다. “예측한 대로 망해가는구나”하고 마음 속으로 반기게 되었다. “곧 행악자 일본제국이 망하는가보다. 우리들이 다 죽어 나가도 우리의 신념대로의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하고 생각하니, 하루의 감방 생활이 전보다 더 길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한 감방의 세월도 흘러 1945년 7월을 지나 8월이 되면서, 미군의 “B 29” 폭격기 편대가 하얀 연기를 길게 느리며 함흥감옥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32)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소리없이 외쳐 보았다.
이렇게 일본제국이 패망해 간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제국주의 조선 침략자들은 아주 다급하여 도망칠 궁리를 하기에 바빴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접수한 서울고등법원도 허둥지둥 상고를 기각하고33)
그 결과를 피의자들에게 엽서 한 장 띄우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다가 8·15에 대낮에 도망치고 말았다.
3.8. 함흥감옥에서 맞이한 8·15해방
“행악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한글 동지들의 믿음대로 일본제국은 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함흥감옥소 감방 안에는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8월 15일, 밤이 깊어서야 전해졌다. 동양 천지 어디에서나 날강도짓만 하던 일본제국이 망하였다는 소식이다.
한 달 전에 실형을 마치고 나간 정태진 동지에 대한 여러 가지의 애틋한 생각을, 곧 누구보다 더 처참한 고문을 받고도 살아나간 정태진 동지의 사람됨, 사식 한 번 못 넣던 그의 가난한 집안을, 아버지를 잃고 그렇게 괴로워하던 모습, 아들이 일찍 일본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본 아버지로서의 심정, 남편의 구속 소식에 심장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내를 보는 순간의 인간 정태진 동지에 대한 생각들을 하다가 막 잠이 들었을 때였다. “술이요, 술! 조선 독립 축하의 술이오.”라고, 하는 큰소리에 귀를 의심들을 하면서 잠에서 깨었다. 감옥소 길 건너편에 있는 약방집 심부름꾼이 감방에까지 들어와서 “조선이 독립했다”고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34)
“우리 주인이 선생님들께 가져다가 드리라고 해서 가져온 술입니다. 오늘 낮 12시에 일본이 항복했어요. 일본 놈들은 지금 울고불고 야단났어요.”라고, 말하자 비로소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해방된 것을 알았다.
8월 15일 밤에, 더욱 감방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나간다. 살아서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술이 떨어질까봐 한 방울씩 혀끝으로 마셨다. 평생에 처음 맛보는 술맛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술은 진짜 술이 아니었다. 가짜 술이라도 3년만에 마셔 보는 술이므로 얼마나 맛있게 마셨는지 모른다. 그 때는 돈을 주고도 진짜 술을 살 수 없었던 때이었다. 그 때는 병원에서 소독용으로 쓰는 알코올에 맹물을 탄 다음에 향료와 설탕을 풀어 넣은 가짜 술들을 만들어 마시던 때35)
이었다.
16일의 아침이 왔다. 함흥 시내쪽에서 “조선 독립 만세 ”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독립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부르며 감방의 애국자들의 출감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의 영접을 받으며 넓게 열려 젖힌 철문을 나섰다.
4. 결론:제이의 삶을 <큰사전> 편찬에 바침
4.1.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기로
1945년 7월 1일에 석인 선생이 만 2년의 실형을 마치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지 1개월만인 8월 15일에 일본제국은 패망하고 한국은 국권을 회복하였다. 석인 선생은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첫맞이하는 순간에도 “얼마나 고생하셨어요?”하고 인사말 한 마디 못 하고 기절하도록 허약해진 아내의 병간호에 정신을 빼앗기고 자신의 몸은 조금도 돌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석인 선생은 해방된 다음날 혼자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달려가 편찬실을 둘러보았다. <큰사전> 원고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문당할 때보다 마음은 더 아픔을 느꼈다. 조선어학회가 20년 동안 써 모은 사전 원고를 왜놈에게 빼앗긴 현장을 실지로 보게 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석인 선생은 <큰사전> 원고를 다시 쓰기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였다.36)
그리고 <큰사전>은 꼭 내놓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8·15해방 닷새 후에, 곧 8월 20일에 조선어학회 긴급총회가 열렸다.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소에서 고생하였던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갖지 못하고, 제 말글을 다시 찾은 새 나라의 국어교육이 가장 시급하여 그 일을 맡아서 하기로 결의하였다. 초·중등학교에서 쓸 국어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 그리고 공민 교과서를 엮어 내는 일과 전 국민의 80%에 이르는 문맹자37)
퇴치를 위한 ‘한글 전달 강습회’와 초·중등학교의 교사 강습회를 전국적으로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근간 사업인 <큰사전> 편찬 사업도 속히 진전시켜 하루라도 빠른 날 동안에 사전을 세상에 내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석인 선생은 아침이면 밤새 아내의 병 시중들기에 피곤한 몸도 돌보지 않고, 학회로 출근하였다. <큰사전> 편찬 일도 바쁜데 ‘한글 강습회’38)
에 나가 가르쳐야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새 학교에서 쓸 국어 교과서 엮기에 온 힘을 바쳤다.
이렇게 바쁘게 3주일을 보냈다. 곧 9월 10일에 왜놈 경찰이 빼앗아갔던 <큰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돌아왔다.39)
“조선어학회가 조선 민족문화 운동을 내세운 대한 독립 단체’란 증거물로 압수당했던 원고지 2만 6천5백 장에 이르는 <큰사전> 원고 뭉치가 모두 돌아왔다. 눈만 뜨면 빼앗긴 <큰사전> 원고가 눈 앞에 어른거렸는데, <큰사전> 원고를 되찾고 보니, 3년 동안 치른 옥고도 씻은 듯이 잊게 되었다. 원고를 되찾은 사전 편찬실은 일이 휠씬 빨라졌다.
그런데 석인 선생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유혹들이 많이 생겼다. 미 군정청에서 부장(지금의 장관)으로 추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 대학 저 대학에서 교수로 모시겠다고 하는 등이 석인 선생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러나 석인 선생은 많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서는 장관 자리나 교수 자리로 가야 하지만, 석인 선생은 이미 <큰사전> 편찬 사업에 “제이의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바 있고, 또 가족들도 석인 선생이 가장 옳은 결심을 하셨다고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석인 선생은 ‘장관도 교수도 마다고 거절’40)
하고,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던 것이다.41)
그리하여 석인 선생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름 그대로 돌과 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만”하고, 비웃고 있었으나 가족들만은 <큰사전> 편찬에 매달리는 석인 선생의 정신을 누구보다 높이 받들고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는 석인 선생은 ‘태진’이란 이름보다는 ‘석인(石人)’ 곧 “돌 사람”이란 아호를 본인도 즐겨 썼다. 좋은 뜻으로나, 나쁜 뜻으로나 “돌”로 불리움을 좋아하였다. 광복된 새 나라에 아무리 할 일이 많을지라도 자기는 한글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이같은 ‘한글 사랑’만이 바로 ‘석인’의 생활이었다.
마침내 1948년 10월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첫째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42)
세종 임금님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뒤 500년 동안에 가장 큰 문화적 업적이다. 이제는 어느 침략자가 이 지구상에서 조선말을 없애려고 한다 해도 없앨 수는 없게 되었다. <큰사전>의 간행은 조선어학회 모든 회원들만의 기쁨이 아니었다. 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발족할 때에 성공을 빌었던 온 국민들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인’에게는 기쁨보다는 남모르는 슬픔이 있었다. 함흥감옥에서 같이 옥살이하다가 순국한 두 한글 동지에 대한 슬픔이었다.
어찌하였던 석인 선생의 희생적 국어 사랑 정신이 조선어학회로 하여금 큰 일을 이룩하게 하였고, 나아가서 세계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함이 되었다. 1949년 봄에 둘째 권과 1950년 봄에 셋째 권을 미국 록펠러 재단의 물자 원조43)
로 간행하게 되었다.
4.2. <큰사전> 완간을 앞두고 순국
1950년 겨우 셋째 권을 세상에 내놓게 되자, ‘6·25전쟁’이 일어났다. 석인도 ‘1·4 후퇴’ 때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겨우 난은 피하였으나, <큰사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석인 선생에게는 감옥 안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마음이 아프다. 한 때라도 <큰사전> 편찬에 대한 걱정이 사라질 때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큰사전>의 원고 전부를 시골로 빼돌려 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았다44)
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얼마 후 곧 1952년의 여름이 되었다. 서울은 수복되었다.
석인은 하루도 부산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울 수복지로 들어가는 ’도강증‘, 곧 계엄 사령부로부터 한강 건너 서울에 들어가는 증명서를 특별히 얻었다. 혼자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이 아니면 사전 인쇄를 할 만한 시설이 없고, 또 사전 편찬에 필요한 참고서를 얻어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신문사의 방 한 칸을 빌어, <큰사전> 원고를 시골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유제한 선생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꽁꽁 묶여 있는 <큰사전> 원고를 다시 펴놓고, 넷째 권, 다섯째 권, 여섯째 권의 원고를 한 줄 한 줄씩 검토하기 시작하였다.45)
서울이 수복되었다고 하나, 포탄 연기는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변두리에서는 아직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46)
이렇게 전세는 아직 안정되지 않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는데도 석인 선생은 사전 편찬에 바빴다. 언제 또 <큰사전> 원고가 수난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유제한 선생에게 ”유제한 선생, 네가 먼저 죽나, 정태진 내가 먼저 죽나“하고, 농담을 진담 삼아 하루도 쉬지 않고, 둘이 겨루기나 하듯 사전 편찬에 매달렸다.
그리하기를 넉 달만인 10월 28일에 넷째 권의 지형을 떠놓기에 이르렀다. 마음은 상쾌하고 몸은 날아갈 듯하였다. 육체의 피곤도 다 풀리었다.47)
그러나 다섯째 권과 여섯째 권의 지형이 나오기까지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빈 자루에 쌀을 채워놓아야 하였다. 이상하게도 쌀자루에는 쌀 한 알갱이도 없이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석인은 쌀을 구하려고 고향인 파주로 떠났다. 기차는 다니지 않았다. 한두 차례 해 본 대로 서대문에서 북으로 가는 군용 트럭을 뒤 쫓아가 올라탔다. 이렇게 올라탄 이가 셋이나 됐다. 털럭거리는 트럭은 파주 입구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언덕 길을 달리던 트럭은 논바닥으로 내리굴러 뒤집히었다.
아아 슬프다. 나이 50에 이르기까지 나쁜 마음 한번 가져 본 적이 없는 이가, 아니 살인마 일본 경찰의 악형에서도 살아남은 이가 <큰사전>의 완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48)
돌아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값진 것이었다.
그토록 한글을 사랑하다가 가셨으니, 아니 이윤재와 한징 선생의 죽음을 따라 순국하였으니 어쩌면, 석인 선생은 거룩하고 복스러운 죽음을 한 어르신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