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수 /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영어 학습의 열풍이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것이 개인적인 주장이기는 하지만, 최근 보도 매체에는 영어를 국어와 함께 한국의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버젓이 실리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는 약소 민족국가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뿐이며, 민족주의를 보다 잘 하기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하고, 진정 한민족의 번영을 보장하는 방법이라면 영어를 국어와 함께 우리의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충분히 고려될 수 있으며, 그러한 영어의 공용어 채택 여부는 철저하게 ‘민족과 국가의 실익’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라는 주장이다.
이는 한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 고유의 문화적인 특수성과 연속성을 지키는 바탕이 되어 온 우리말과 글을 ‘실익을 위해서라면’ 버릴 수도 있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다른 민족의 문자를 빌어 썼던 적은 있었으나, 한민족은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말을 잃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말을 잃지 않고 지켜왔던 그 힘이 세계 문자사상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훈민정음의 탄생을 가져 왔고 지금까지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연속성을 지켜내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을 다듬고 연구한 선배 국어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 했던 국어학자의 우리말 연구를 통해 그 정신적인 토대를 찾아보는 것은,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석인 정태진 선생의 국어 문법 연구에 관한 글이다. 선생의 국어 연구의 출발점은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이다. 일생을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에 헌신한 석인 선생은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므로 “우리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1)
고 하였고 “모든 지식의 최후 근거는 철저한 자기인식을 떠나서 그 존재이유가 없는 것이며 모든 문화의 본질적 문제는 민족적 고유문화를 적극적으로 앙양하는 것이 마땅히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2)
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주장은 오늘날 현대 한국인 특히 지식인들의 국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치하인 1927년, 25세의 나이로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선생은 철학도 교육학도 아닌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것은 분명히 모든 문화의 본질적 문제가 민족적 고유문화를 앙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기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석인 선생의 문법 연구 개요(1)
2.1. 석인 정태진 전집(상, 하)에 수록된 글을 보면, 석인 선생의 국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문법의 주된 하위분야였던 소리갈, 씨갈, 월갈을 중심으로 방언, 옛말, 사전, 번역 문제 그리고 문자, 어원, 비교언어학, 언어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석인 선생의 국어에 대한 관심은 총체적인 관심이라고 할 만큼 그 폭이 매우 넓었다. 특히 정태진 전집 하권에 들어 있는 유고집은 모두 선생의 원고를 영인한 것으로서, 수정 및 가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 석인 선생의 국어 연구에 대한 치열함과 선생의 문법 연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말의 본’(pp.209-242)은 주로 소리갈에 관한 것이고, ‘우리말 연구’(pp.243-287)는 어원에 관한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pp.288-289)은 우리의 말과 글이 지닌 특징에 대한 글이며 ‘옛말과 옛글’(pp.290-325)은 전반부(pp.290-297)는 옛말 찾기, 옛말과 현대말의 차이, 문자의 발달 단계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pp.298-325)는 언어학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후반부는 연이어 나오는 ‘언어학개론’(pp.326-333)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편집상의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국어학개론’(pp.334-348), 국어문법론(pp.349-411)과 ‘방언학개론’, ‘방언조사표’가 차례로 실려 있다.
방언, 옛말 연구 및 어원에 관한 것은 다른 필자에 의해 자세히 소개될 것이므로, 이 장과 다음 장에서는 석인 선생의 문법론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유고집에 나타난 석인 선생의 민족관과 언어관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2.2. 석인 선생은 소리의 갈래와 바꿈 따위를 연구하는 소리갈[音聲論], 낱말의 갈래와 바꿈 따위를 연구하는 씨갈[品詞論], 낱말이 모이어 우리의 의사를 완전히 나타내는 방법을 연구하는 월갈[文章論]을 말본의 세 부분으로 삼고 있다.3)
선생이 제시한 국어연구방법론의 갈래로 보면 이 중에서 씨갈과 월갈은 국어문법론의 갈래에 드는 것들이다.
국어연구방법론(국어학개론, 석인 정태진 전집(하), p.337.)
그러나 선생의 ‘국어문법론’(p.349)에는 소리갈, 씨갈, 월갈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문법(즉 말본)은 음성, 품사, 문장의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주로 씨갈과 월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2.3. 씨갈은 ‘직능(職能)으로 본 말의 갈래’를 말하는데, 크게 임자말[體言], 풀이말[用言], 꾸밈말[修飾語], 홀로말[獨立語]로 분류한다. 다시 임자말은 이름씨[名詞]와 대이름씨[代名詞], 풀이말은 움직씨[動詞]와 그림씨[形容詞], 꾸밈말은 매김씨[冠形詞]와 어찌씨[副詞]로 나누었고, 홀로말은 느낌씨[感歎詞]라 하였다. 이를 보면 국어의 품사 체계는 7품사 체계인데 선생의 품사 체계에는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어 왔던 ‘조사’[助詞]가 빠져 있다. 그 대신 임자말에 붙는 토[助辭-漢字가 다름]와 풀이말에 붙는 말끝[語尾], 부사에 붙는 토를 도움말[補助語]로 묶어 분류하고 있다.
한편 씨의 완전성에 따라 각 씨를 완전씨와 불완전씨로 나누고 있다. 예컨대 ‘바, 지, 줄, 수’는 불완전이름씨, ‘이, 것, 제’는 불완전대이름씨, ‘잊어 버리다, 하여 보다, 먹기도 하다’의 ‘버리다, 보다, 하다’는 불완전움직씨, ‘큰 듯하다, 긴가 보다, 좋기도 하다, 먹을 만하다’의 ‘하다, 보다’를 불완전그림씨, ‘대로, 더불어, 하여금, 해서’ 등은 불완전어찌씨로 다룬다. 한 쪽 여백에는 ‘먹기도 한다’의 ‘하다’가 대동사(代動詞)로, ‘좋기도 하다’의 ‘하다’가 대형용사(代形容詞)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적어 놓았다.
단어는 으뜸조각[原辭]과 씨가지[接辭]로 구성되는데, 씨가지는 머리가지, 허리가지, 발가지로 구분된다. 이 구분은 일단 접두사, 접요사, 접미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씨가지의 구분은 단어 분류의 기준으로 유용하게 사용된다. 홑씨[單詞]는 가지 없는 홑씨(개, 토끼, 해, 별)와 가지 있는 홑씨(머리가지-참새, 숫처녀, 엇셈 ; 발가지-아이들, 해님, 매질)로 분류한다. 겹씨 또는 거듭씨[複詞]는 가지 없는 겹씨(마소, 옷갓, 봄가을, 나무벌레, 자주자주, 혼나다)와 가지 있는 겹씨(머리가지-올콩, 조밥, 굴밤나무, 외나무다리 ; 허리가지-안ㅎ밖, 나무ㅅ가지, 저ㅂ때 ; 발가지-삯바누질, 물새들, 낱낱이)로 구분한다.
홑씨와 거듭씨(겹씨)의 개념은 현재 단어 분류 논의에 사용되고 있는 단일어와 합성어(파생어와 복합어)의 구분4)
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현재 흔히 파생어로 분류하고 있는 단어들은 발가지 있는 홑씨나 겹씨에 해당한다.
2.4. 말의 바꿈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뜻바꿈[意義變化], 끝바꿈[語尾變化], 씨바꿈[品詞變化], 자리바꿈[格變化]이 그것이다. 뜻바꿈은 으뜸조각에 씨가지를 더하여 뜻을 더하거나[加意變化] 또는 세게 하는 것[强勢變化]으로 씨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고, 씨바꿈은 씨뿌리[語根]에 도움뿌리[補助語根]을 더하여 씨를 바꾼다고 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접두사에 의한 파생어는 뜻바꿈에 해당하고 접미사에 의한 파생어는 씨바꿈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현재는 활용에 의한 것과 파생에 의한 것을 구분하여 다루고 있으나, 석인의 문법에는 그러한 구분이 보이지 않고 모두 씨바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약하다, 밑지다, 익살맞다’의 ‘하, 지, 맞’은 물론, ‘사내답다, 복스럽다, 슬기롭다’의 ‘답, 스럽, 롭’, ‘놀랍다, 그립다, 졸립다’의 ‘ㅂ’, ‘미쁘다, 아프다, 고프다’의 ‘브’, ‘집집이, 다행히’의 ‘이, 히’, ‘넓히다, 낮추다’의 ‘히, 추’, ‘웃음, 잠, 씀씀이, 읽기’의 ‘이, 음, 기’, ‘같음, 푸름, 감, 옴’의 ‘음/ㅁ’을 모두 도움뿌리로 처리하고 있다.
자리바꿈에 대해, 격(case)은 서양말은 ‘자체 내의 변화’에 의한 것이고, 우리말은 ‘자리토씨’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5)
토는 자리토[격조사]와 도움토[보조사]로 나눈 것으로 생각된다. 자리토는 임자자리(主格-가, 이, 에서, 께서, 께옵서), 풀이자리(說明格-이라, 이요, 이냐), 기움자리(補助格-가, 이), 매김자리(所有格-의), 어찌자리(副詞格-에, 에서, 에게, 으로, 보다), 부림자리(目的格-을, 를), 부름자리/느낌자리(呼格-야, 아, 시여, 이시여)로 나누었다. 임자자리토에 대해서는 예사와 높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예사에는 ‘낱으로’인 경우에는 ‘이, 가’를, ‘덩이로’인 경우에는 ‘에서’를 쓰고, 예사높임에는 ‘께서’, 아주높임에는 ‘께옵서’를 쓴다고 하였다.
도움토는 각 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는 없지만 ‘도, 만, 는, 은, 든지, 야, 이야, 마다, 까지’ 등을 가리킨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토를 ‘관계를 보이는 토’(이, 를, 에, 로), ‘뜻을 더하는 토’(마다, 만, 부터), ‘어찌씨에 붙는 토’(도, 은, 만), ‘풀이씨에 붙는 토’(고, 그려)로 나누기도 하였다.
2.5. 석인 선생이 제시한 풀이씨의 단어 구조는 독특하다. 먼저 줄기와 씨끝으로 분석한다. 다시 줄기는 ‘머리가지+씨몸+도움줄기’로 구성되는데, 씨몸은 ‘뿌리+도움뿌리’로 구성된 것이다. 도움뿌리에서부터 씨끝까지는 발가지에 해당한다.6)
이 위계도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발가지의 존재다.(여기서 발가지는 접미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머리가지가 씨몸의 앞에 붙는 요소라면 발가지는 당연히 씨몸의 뒤에 붙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 위계도는 발가지가 씨몸의 일부인 도움뿌리에 걸쳐 있는 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위계도에서 발가지는 앞서 단어 분류와 관련하여 제시한 발가지(접미사)와는 다른 것 같다. 여기서의 발가지는 으뜸조각[原辭]이나 씨뿌리[語根]에 붙는 모든 접사나 어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움뿌리는 접미사와 접미사적인 특성을 지니는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도움줄기는 이른바 선어말어미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석인 선생은 (씨)뿌리를 완전씨뿌리와 불완전씨뿌리로 나누고 있다. 완전씨뿌리는 ‘기름지다’ ‘사내답다’의 ‘기름’이나 ‘사내’처럼 ‘한 개의 씨’인 경우이고 불완전씨뿌리는 ‘착하다’, ‘똑똑하다’의 ‘착’이나 ‘똑똑’처럼 ‘씨가 아닌’ 경우이다. 이 구분은 현재의 어간(語幹)과 어근(語根)의 구별과 비슷하다.7)
석인 선생은 ‘헛손질하시었다’를 ‘헛(머리가지)+손(뿌리)+질(도움뿌리)
+하(도움뿌리)+시(도움줄기)+었(도움줄기)+다(씨끝)’로 분석한다. ‘하’
의 성격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접미사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독립적인 동사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 그리고 범주중립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8)
이 공존하고 있다.
‘하’는 독립적인 어사(語辭)이면서도 접미사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석인 선생은 ‘하’의 독립성을 중시하여 뿌리에 두되 ‘하’의 접미사적인 성질을 동시에 고려하여 도움뿌리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발가지는 위의 위계도와 같이 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위계도상으로는 묘한 위치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묘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위계도를 통하여, 풀기 어려운 국어의 현상을 앞에 놓고 고민하는 석인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3. 석인 선생의 문법 연구 개요(2)
3.1. 앞서 우리는 석인 선생의 발가지(‘도움뿌리+도움줄기+씨끝’)가 파생접미사는 물론 선어말어미, 어말어미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보았다. 현대 문법 연구(통사론 또는 문법론)에서는 이 발가지가 국어 문장 구조를 밝히는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문법 연구에서는 ‘씨가지[接辭]의 거듭’에 의한 말(단어)의 형성을 밝히는 문제에 한정되었다. 대부분의 초기 국어학자들이 그랬듯이, 석인 선생의 월갈 연구 역시 씨갈이나 소리갈 연구에 비해서는 덜 치밀하고 양적으로 적으며 그 성격도 ‘홑월’과 ‘겹월’의 분류를 중심으로 하는 월갈 연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월(문장)을 나누는 데는 두 가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하나는 ‘바탕’으로 본 월의 종류인데 이것은 홑월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 기준이다. 또 하나는 ‘짜임’으로 본 월의 종류인데 이것은 홑월과 여러 가지 겹월을 분류하는 기준이다.9)
홑월은 베품꼴, 물음꼴, 시킴꼴, 꾀임꼴, 느낌꼴 등으로 나눈다. 겹월은 주종적(主從的)인 것과 동등적(同等的)인 것으로 나누고 동등적인 겹월은 다시 벌린월과 이음월로 나눈다.
그러나 가진월, 벌린월, 이음월 등의 문장 구조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림으로 제시된 문장 구조 분석의 예를 통해 석인 선생의 문장 구조 분석 방법을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한 예를 제시한다.10)
3.2. 국어 문법 연구에서 그동안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시제이다. 석인 선생은 시제를 ‘이제/지난/올적’의 세 하위범주로 나눈다.11)
이 구분은 서술어의 종결형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이제’는 ‘(ㄴ, 는)다’, ‘지난’은 ‘었다’, ‘올적’은 ‘겠다’에 의해 표시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이제추칙’(이제추측)은 ‘올적’의 ‘겠다’와 동일한 형태인 ‘겠다’, ‘과거의 과거’는 ‘었었’, ‘과거의 추칙’은 ‘었겠’에 의해 표시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석인 선생은 종결형에서의 시제 구분과 관형형에서의 시제 구분을 달리하고 있는 듯하다. 석인 선생은 관형형 어미를 ‘그림토, 그림딸림토’라 부르고 있다. 관형형의 경우에는 ‘잇어지남/지남/만남/못옴’의 네 시제 범주로 나누었는데12)
이 구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시제적인 구분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구분은 ‘이제/지난/올적’의 구분보다 오히려 시제적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을 기준 시점으로 하여 이 시점과 ‘만나면 현재’(만남)이고 ‘지났으면 과거’(지남)이다. 그리고 아직 ‘오지 못한 시점이면 미래’(못옴)이다.13)
‘잇어지남’은 ‘던’의 쓰임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과거 어떤 시점을 기준시점으로 했을 때 그 시점과의 만남(과거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현재)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잇어지남’은 ‘던’ 앞에 오는 요소에 따라 다시 구분한다. ‘었었던’은 ‘다지남’, ‘었던’은 ‘지남’, ‘겠던’은 ‘못옴’으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구분 방법은 현재의 시제 연구에서 다루는 절대시제/상대시제의 구분 방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14)
‘지남’은 형용사, 동사에 붙는 ‘ㄴ, 은’의 쓰임을 말한 것이다. 형용사의 관형형 어미 ‘ㄴ, 은’을 동사의 관형형 어미 ‘ㄴ, 은’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지남’을 나타낸다고 한 것이 특이하다. 한편 ‘만남’은 ‘는’에 의한 것이고, ‘못옴’은 ‘ㄹ, 을’에 의한 것이다.
3.3. 석인 선생은 격조사들 중에서 속격의 ‘의’와 사이시옷 ‘ㅅ’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5)
먼저 ‘사람 또는 동물 이외의 이름 + “의” + 명사’에서, “의” 대신 ‘ㅅ’이 쓰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무ㅅ가지’, ‘밤ㅅ손님’, ‘산ㅅ길’, ‘책상ㅅ다리’, ‘논ㅅ귀’, ‘물ㅅ가’, ‘돌ㅅ소리’, ‘쇠ㅅ소리’, ‘볏가을’, ‘보릿가루’, ‘숨ㅅ구멍’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또 ‘(___) 로 (정한, 쓰는, 파는, 장치된)’의 뜻으로 쓰는 명사에 다른 명사가 붙을 때 ‘ㅅ’을 쓴다고 하였다. 그 예로는 ‘배냇소’, ‘볏술’, ‘병ㅅ술’, ‘잔ㅅ술’, ‘행주ㅅ수건’, ‘도짓소’, ‘변ㅅ돈’, ‘기곗배’ 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ㄹ’로 끝난 어간과 명사가 연결될 때 ‘ㅅ’이 쓰이는 예로 ‘빨ㅅ대’, ‘빨ㅅ병’을 들고 있다. 그리고 ‘들것’, ‘물것’, ‘물부리’, ‘자물쇠’, ‘날도’, ‘날개’, ‘날것’도 함께 제시해 놓고 있는데 이 예들이 ‘ㅅ’을 지닌 것들인지 아닌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알기 어렵다. ‘(___)에서 (파는, 쓰는, 일하는)’의 뜻으로 쓰는 명사에 다른 명사가 붙을 때 ‘ㅅ’이 나타나는 예로는 ‘뱃장사’, ‘뱃사공’, ‘뱃장직’, ‘뱃지게’ 등을 들고 있다. ‘(____)에 (쓰는, 있는, 사는)의 뜻으로 쓰는 명사에 다른 명사가 붙을 때 ‘ㅅ’이 나타나는 예로는 ‘바느질ㅅ고리’, ‘혓바늘’, ‘바느질ㅅ자’, ‘바닷개’, ‘물ㅅ고기’, ‘툇돌’ 등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사가 겹쳐질 때 ㄹ 밑에서’, ‘ㅅ’이 쓰이는 예로 ‘열ㅅ둘’, ‘스물 셋’ 등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속격의 ‘의’나 사이시옷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도 활발히 이루어진 바가 있다.16)
앞으로 석인 선생의 연구는 물론이려니와 다른 초기 국어학자들의 연구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석인 선생의 국어관과 언어관
4.1. 석인 선생의 국어관은 주로 전집에 실린 논설들에 나타나는데, 유고집의 ‘우리말 연구’ 머리말 부분에도 나타난다. ‘우리말 연구’ 머리말에서 선생은 “나를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세계의 지리를 배우기 전에 먼저 우리의 지리를 배워야 될 것이며 세계의 역사를 읽기 전에 먼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17)
또한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느라고 일생을 허비하면서도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18)
을 반성하고 있다.
석인 선생에게 있어서, 우리말과 우리글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었다. 우리말과 글은 우리의 생명이므로 피로써 지켜야 하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은 자손 만대에 전해 줄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서 다시금 짓밟혀서는 안 되는 민족의 혼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문자를 가지고도 문화적 노예, 문화적 걸인의 생활을 계속하여 온 것은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며 완고한 사대주의의 철저한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석인 선생은 외국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석인 선생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문화를 북돋우는 동시에 다른 민족의 문화를 우리의 말과 글로 완전히 소화시켜야만 된다”고 하였고 “이 소화력을 기르려면 결국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을 힘있게 살리고 굳세게 길러야 되는 것”이라 하였다.19)
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이들의 눈에는, 우리 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 낡은 사고에 젖은 고집센 민족주의자로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인 선생은 다른 민족의 문화를 소화시켜 “우리 문화의 완전한 발달”을 보기 위해서 우리의 말과 글을 더욱 힘있는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민족의 앞날을 제시한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석인 선생을 되돌아 보는 중요한 이유이다.
4.2. 석인 선생 전집의 유고집에 있는 ‘우리말 연구’는 우리말의 말밑[語源]에 관한 것이다. 이 말밑 연구에는 특히 석인 선생의 언어관과 국어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석인 선생은 언어에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문화와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인 선생은 ‘사귀다’와 ‘섞다’가 같은 말밑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20)
일본어에서도 ‘majiwaru’(사귀다)와 ‘majeru’(섞다)의 말밑이 같고, 영어에서도 사귄다는 말을 ‘to mix with’라고 하는데 이것도 섞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말의 ‘사귀다’와 ‘섞다’의 말밑도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석인 선생은 “우리말끼리만 맞추어 놓고 보면 같은 말밑에서 나온 말인지 그렇지 아니한지 분명하지 아니한 것도 외국말과 비교하여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 때가 많은 것이니 인류사회의 언어심리(言語心理)에 공통된 점이 있는 까닭”이라 하였다.
또 ‘가시’와 ‘가스나’의 말밑에 관해서는 영어의 ‘man’과 ‘woman’의 말밑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21)
경상도에서는 여자를 ‘가스나’라고 하고 함경도에서는 남자를 ‘스나’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가시’와 ‘가스나’의 ‘스나’는 같은 말밑에서 나온 것 같고, ‘시집’,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시’와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 |
-----> |
가시 |
스나 |
-----> |
가스나 |
(남자) |
(여자) |
여자를 표시하는 말에는 ‘가’를 앞에 붙이는 것은, 영어에서 남자를 ‘man’이라 하고 여자를 ‘woman’이라 하여 ‘wo’를 덧붙이는 것과 같은 심리작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과 ‘글씨’는 같은 말밑 ‘글’에서 나온 것이고, ‘글’은 ‘긋다’ 또는 ‘긁다’와 같은 말밑에서 나온 듯하다고 하였다.22)
영어의 ‘write’도 긁는다는 말에서 나왔고, 일본어의 ‘カク’도 ‘書’ 또는 ‘搔’의 뜻이 있으며, 한문에도 ‘書’ 또는 ‘搔’의 소리와 뜻이 비슷한 것은 재미있는 대조가 된다고 하고, 이것으로 보면 인류문화의 초기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에 칼끝과 같은 물건으로 긁어서 썼고 그렸던 것을 추상(推想)할 수 있다고 하였다.
4.3. 석인 선생은 국어의 말밑 연구를 통해, 인간의 공통적 심리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우리 민족 고유의 심리와 문화적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도 적극적이었다.
석인 선생은 ‘사람’과 ‘사랑’은 다 같이 ‘살다’라는 말밑에서 온 것인데, ‘사람’은 ‘살아 있는 물건’ 곧 ‘생물의 대표’가 되는 것이고 ‘사랑’은 ‘살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으로서 이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우리 민족의 철저한 관찰력과 옛 선조들의 철학적 두뇌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3)
한편 영어의 ‘love’와 ‘live’는 말밑이 같으나, ‘man’과 ‘love’는 말밑이 다르다고 하였다.
‘살림’과 ‘살림살이’는 ‘살다’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살다’는 ‘자기가 사는 것’이요, ‘살리다’는 다른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이니, ‘살림살이’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가 사는 것이 곧 우리의 ‘살림살이’라고 하였다.24)
이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クラシ’[暮]는 밝은 날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어두운 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서 개인 생활에 권태를 느끼는 그들의 태도가 이 말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낙천적인 인생관을 보여 주는 말로는 ‘누리다’와 ‘뉘’를 들고 있다.25)
‘누리다’[享]는 ‘누리’[世]와 말밑이 같고 ‘누리’가 줄어서 ‘뉘’가 되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이 세계가 ‘누리는 장소’ 곧 행복의 장소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인 선생의 말밑 연구에서는 일본어와의 비교가 자주 눈에 띈다. 주격조사 ‘가’는 일본어의 ‘ガ’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일본어에도 ‘ガ’가 없었으며, 이는 근래에 생긴 말로써 아마도 우리말의 ‘가’와 말밑이 같은 것 같다고 하였다. 또한 말끝에 쓰는 ‘다’는 일본어의 말끝 ‘ダ’와 말밑이 같고, ‘까’는 일본어의 말끝 ‘カ’와 말밑이 같은데, 옛 우리말은 의문의 경우에도 ‘다’를 썼으니 현재 일본어에서 의문문에 ‘ダ’를 쓰는 것은 우리말의 고형(古形)이 그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26)
석인 선생의 우리말 연구에는 인간의 공통된 언어심리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언어심리에 대한 비교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언어 연구에 대한 석인 선생의 균형적인 태도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개별언어로서의 국어를 연구하려 했던 석인 선생의 태도가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5. 맺는말
이상으로 석인 정태진 선생의 유고집을 중심으로 선생의 우리말 연구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실익을 위해서라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연속성 같은 것은 버릴 수도 있다는 주장이 활개치는 위기의 시대에, “모든 지식의 최후 근거는 철저한 자기인식을 떠나서 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며 모든 문화의 본질적 문제는 민족적 고유문화를 적극적으로 앙양하는 것이 마땅히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한 석인 선생의 말을 오늘날 우리들은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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